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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71)김종욱 연극단, 악단을 울리는 신판 사기사건= 어떤 극단이나 악극단이 경영곤란에 빠졌을 시 이것을 에워싸고 대금학貸金學 모리배 또는 전후자 사이에 한 목 끼는 소위 중개자라는 것이 있어 앞뒤를 사기 횡착橫着하여 진지한 무대인들을 울리고 있는 사실은 지금에 비롯한 일이 아니거니와 여기에 편촉騙促되는 사건은 개중에서 가장 교묘한 방법이며 지적 악질 이것이라 할 것이다. 일작 22일 시내 영락정 모 악단에는 바야흐로 이 악질단이 원숙화 되려다가 다행히 기선機先 예민한 동 악단 대표의 돌격으로 드디어 그 수단은 미연에 발각되어 묵과할 희비극 일막을 빚어내고 말았지만 이제 그 사건의 내막을 들어보면 이러하다. 악단에는 서건 발생의 수일 전부터 "자기는 모 요로에 있는 사람인데 이번에 유동자금이 삼백만원 가량 수중에 있으니 이것은 건국을 위한 예술사업에 쓰고 싶다. 위선 귀 악단에도 50만을 투자하고 싶으니 어떤가?” 하고 찾아온 중년신사 전자영全구榮(가명)이라는 자(?)가 있었다. 이 문자그대로의 청천벽력적 예술이해 자본가의 내방을 본 동 악단에는 마침 현재 자기들 악단의 유지가 곤경에 빠지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그들은 이 감언이설에 귀를 기울여 이래 수일간 출자 수속하는데 필요타는 없는 주머니를 털어가며 응하였을 뿐 아니라 금액까지 솔선 꾸어주면서 교섭을 진행하여 왔다 한다. 이리하여 급기야 금일은 현금과 구식계약을 체결하는 22일 날 정오 악단측에서는 그제야 대표자까지 대동하여 장본인을 면대綿代하였던 바 역시 꿈같은 변설辯說을 늘어놓아 일동을 연기속에 두루 말았었는데 아무리 궐자厥者의 인상을 살펴보아도 틀림없이 이것은 사기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직각한 대표자는 즉석에서 이 불한당의 이면피二面皮를 보기 좋게 벗겨놓았다는 것이다. 그는 벌써 이 악단뿐이 아니라 다른 극단에 까지 이런 수단으로 공짜 향응, 또는 여우를 농락하는 등으로 유유히 무대인들을 속여 온 사실이 있었다 한다. 더욱 현금 우리 무대예술계의 운영유지가 혼미에 빠지고 있는 이즈음을 틈타서 이 같은 극히 지능적인 악덕 사기배들이 또 어떠한 수단과 방법으로 출현할지 예상할 수 없으므로 모름지기 여러 단체들은 특히 조심이 필요하리라는 동단 대표의 체험 권고. (藝術通信 271호. 1946년 8월 24일) =극장= 이번엔 흥행주의 수입을 내사, ‘재산관리처’ 주목되는 움직임-적산극장 문제: 국립극장 문제를 에워싸고 합동통신사의 공동 경영설의 대두로 바야흐로 적산극장 문제의 귀추가 자못 주목되는 이 즈음 23일 오전 경기도 재산관리처에서는 돌연 시내 각 영화배급업자를 역방하고 각 극장으로부터 수입한 보율금액(단가를 포함한)의 내사를 시작하였다 한다. 이것은 혹 이즈음 항간 풍설에 떠도는 적산 관리극장의 경리부정에 대처한 확증수집인 듯이도 보이며 또는 앞으로의 낙찰 시과 그 운영에 수지가 맞을 것인가 아닌가의 기본적 수자의 산출을 보려고 하는 것인지 좌우간 현금 미묘한 예계에 적지 않은 쇼크를 던지고 있다.(藝術通信 271호. 1946년 8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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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70)김종욱 [3만인의 벗!-‘벙어리 극단 공연을 보고-] 벙어리가 연극을 하다니- 온! 참 , 장님이 극장 구경 간다는 것과 꼭 같군! 하고ㅠ농아극장 ’남 모르는 사상‘ 상연된다고 하자 이렇게 수군거렸었다. 외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성황에 있던 것이지만 조선에서는 처음의 일이라 하기는 반신반의. 막이ㅡ올려지는 동안을 안타까웁게 기대리었다. 그리고 꼭 ’어색‘하리리 했던 것인데, 막이 열려 극을 보자 그런 기우杞憂는 전혀 부당하였던 것이다. 아니 기우가 부당했다는 것을 의식했다기보다 보통 연극과 같이 관람할 수 있엇다. 한 막이 끝나자 ‘어색’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을 생각하고 그런 점을 잡아 내리려 하였지만 좀처럼 잡혀ㅐ이지를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구태어 찾아내자니 그 손짓이 좀 기이했다던가 변사의 어조가 유난히 귀에 거실리워서 토키 전 시대의 무성영화를 보는 것 같은 감은 나왔으나 그 동작에는 조금도 어색이란 느낌을 갖지 않고 볼 수가 있었다. 극평가가 보는 눈으로는 전문적 여러 점의 견해가 있으리오마는 단순한 관객으로서의 인상은 이러하리라고 생각된다. 벙어리가 하니까 일종의 동정이 의식 전면에 나타나기 때문인지는 모르나 확실히 벙어리도 연극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잘 알게 되었다. 들은 바에 의하면 그들은 전연 소인素人들로서 거의가 다 취직하고 있는 사람들로 없는 여가를 틈타서 만 3개월이란 일자를 꾸준히 노력해왔다는 것을 들을 때 노력과 단결이란 어떤 장벽도 넘을 수 있다는 것 같이 여겨졌다. 이 극의 작자요 연출가요 총자휘자인 정동섭鄭東燮(이도 벙어리)씨가 연습 중 때로는 몽둥이로 통솔하였다는 이야기는 그 열성을 충분히 보여주게 한다. 그래도 그 통솔을 달게 받으며 연기자는 몇 일 밤을 새워가면서도 연마를 했다고 한다. 그들의 심정을 살펴봄에 연극으로 하여금 말 못하고 말 못 듣는다는 그만한 제약을 받는 그들의 자신을 위로함은 물론 조선에 있는 3만의 농아자를 위하여 그들을 계몽하고 그들을 지도하려는 순일한 비통의 결심이 단결과 노력이란 것으로 뭉쳐진 소치가 아닌가 생각된다. 농아극은 연기로서는 소인극의 역域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조작자가 없는 인형극같은 특수한 연극이나마 이런 점이 아니라 그들이 무언으로 제시한 그들의 단결과 노력과 규율은 일반 연극인의 좋은 거울이 아닐까. 이 시사가 헛되지 않기와 이들이 자신을 자위하고 자기들 봉어리들 광명의 길로 끌려고 하는 그들의 힘찬 움직임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藝術通信 271호. 1946년 8월 24일) ['국전國專‘ 연극 공연, 9월 초순 국도서]: 기보한 바와 같이 국학전문 연극부에서는 동교 창립기념으로 동 연극부 각본계 구성인 '세기의 개가’ 3막 5장을 가지고 제1회 연극발표회를 개최코자 만반의 준비를 거듭해오던 바 드디어 9월 초순부터 열기로 되었다 한다. (藝術通信 271호. 1946년 8월 24일) [연극학도의 수기-연극이전 (2)] 무대예술연구회 제공 혁명가의 정신 진실에 대한 철저한 노력과 자기 희생 진실을 위해서는 일체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無라고 생각하는 정신! 혁명을 도웁는 연극의 정신이 또한 이런 혁명가적 정신과 質이 틀림이 없다. 또한 철학적 정신과도! 소시민적 근성에서 근본적 동요를 거쳐 진부하고 앍고 보수적인 모든 것에서 일체 탈각하여 새롭고 우리들의 독립한 진실에 향한 마음일 것이다. 이것이 즉 연극정신이 아닌가? 근본적 동요란 사색과 자기 반성의 노력한 결과이며 비판적 정신에서 나오며 이 독립을 방색防塞하는 모든 박해에 대하여 지지 않고 용감히 반항하여 싸우는 실천의 용기라고 한다. 이럼으로써 완전히 진보적 입장에 서게 되며 태도를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연극이란 무엇이냐?’의 해결은 타인의 설에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연극을 하는 정신에 있어 나올 것이다. 따라서 연극을 하는 정신에는 겸손, 정직, 진실 등 말로서는 여러 가지 있겠으나 일언이폐지하면 의식과 자기 충실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하므로 연극은 유행상품도 아니고 사교적 장식도 아닌 것이 명백하나 정신 없이 논설만을 일삼는 향락주의자가 사랑이 없이 색만 구하는 불량청년과도 같이 연극정신이 없이 연극을 구하려는 도락자道樂者와 위선자가 일하지 않고 놀고 먹자는 해충의 존재와도 같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무대상에 화장을 하고나서 빨갛고 푸른 조명에 맞으며 웃는 게 연극이 아니다. 연극을 통하여 정신적 육체적 행동을 근본으로부터 반성하여 낡은 것을 알고 새로운 것을 탐구하여 낡은 것은 낡은 것으로 새로운 것은 새로운 것으로 취사선택하는 영원의 성실을 의미하는 이러한 연극정신이 오래지 않아 혁명적 연극을 낳을 수 있는 것이라 믿는다. 그러므로 나로서는 우선 낡은 것의 탈피작용과 새로운 술을 새로운 부대負袋속에라는 이 새로운 부대의 체득에 있다. 위대한 사상가는 결국 자기에 돌아가서 밑으로부터 근본으로부터 무엇이냐? 왜냐? 누구를 위하여? 의 근본원칙을 추구한 사람들이라 말한다. 이것이 없이는 연극정신도 운운할 수 없다. 즉 사상누각砂上樓閣이다. 이것이 연극이전의 것이며 아울러 연극생활 그것일 것이다. 나는 우리들의 요구에 응하여 어떠한 동기라도 자기의 내부에 돌입하여 감득하여 알고 뉘우쳐서 실제에 움직이지 않으면 싸우는 의지를 정말로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내가 사모하는 진실에 연극정신에 도달하는 수단 그것의 방법으로서 연극을 생활하는 태도를 일상생활에 있어서 똑바로 선도하고 싶다. 과연 될 수 있을까? 또 꾸준히 반성하여가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藝術通信 271호. 1946년 8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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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69)김종욱 극장 대여 입찰 심사단에서는 작금 별항 야기되고 있는 국립극장 문제에 대하여 작일 심사단 일동은 ‘앤더슨’ 지사를 방문하고 양자 간에 벌어지고 있는 분규에 대하여 질의를 한 바 있었다 한다,(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시내 극장 동원표] 극장 제명 입장인원 국제 영화 ‘자유를 우리에게’(7일) 2067 극단 황금좌 공연(1일) 2060 국도 극단 낙랑극회(6일) 677 (7일) 840 수도 영화 ‘아부라함 링컨’ (6일) 3404 (7일) 840 중앙 극단 청춘극장 (7일) 366 악극단 새별(1일) 1712 서울 영화 ‘진주의 목걸이’ (2일) 979 (3일) 7352 단성 영화 ‘밀림의 砲兒’ (1일) 1459 (2일) 2592 장안 극단 농아극장 (2일) 680 (3일) 891 제일 백민, 백조, 태평양 공연 (6일) 600 (7일) 726(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인사] # 정흥섭鄭興燮(농아극장聾啞劇場 총무) 농아극 ‘남 모르는 사상’ 공연 인사차 래사 # 현학수玄鶴洙(동 극장 사업부) 동상 (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음악= [문교부에서 현상 작곡 모집]: 문교부장 유억겸兪億兼씨가 작일 발표에 의하면 문교부에서는 전조선인의 작곡을 장려하기 위하여 남조선주민의 현상작곡 모집을 주최하고 있다고 한다. 중등학교 합창 중 우수작품 3점의 작곡가에게는 상을 수여하고 또 이 작품을 중등학교 음악교과서에 편입할 것이다. 제재題材는 조선인의 생활을 상징하는 것이어야 되는데 그 작품은 전연 창작이고 소박한 제재이고 또 중등학교 합창용에 적당한 점 등을 참작하여 심사할 것이다. 곡의 길이는 10분 이내이어야 되며 조선민요, 고담, 고곡요古曲謠 기타 고전요古典謠 기타 조선 역사적 사실 등에서 취재하기 바란다고 한다.(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강화유학생회 ‘연예의 밤’ 성황]: 강화유학생회江華留學生會에서는 귀향을 기회로 지난 16, 7 양일 읍내 잠두예배당蠶頭禮拜堂에서 ‘연예의 밤’을 개최하고 지방민에게 적지 않은 감명을 주었다는데 당일 프로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남성 독창: 권평환權平煥(세대世大), 송윤석宋允錫(경농京農), 김정원金鼎遠(배재培材), 고명선高明善(인중仁中), 금식琴植(경대經大) 2. 여성 독창: 김인배金仁培(이고녀二高女), 박덕순朴德順, 이윤화李允華(여의전女醫專) 3. 남성 4중창: 권평환, 강우철康宇哲, 오대식吳大植, 양현문梁顯文 4.'민족의 투쟁‘ 전 3막 (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예술= [예술대학 발기인대회 래 28일 중앙애육원中央愛育園서 개최]: 영화동맹과 연극동맹 그리고 미술 기타 각 단체 공동으로 예술대학 건립을 목표로 동 기성준비위원회를 결성한 다음 이래 준비 중이라 함은 누보한 바 있거니와 드디어 이에 관한 모든 구체안이 성립되었으므로 오는 28일 오후 1시부터 시내 명치정 중앙애육원에서 문화 각계 인사를 총망라한 종합예술대학 발기인대회를 개최키로 되었다 한다.(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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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68)김종욱 벙어리들의 연극= 남모르는 사상 조선에서 처음으로 22일부터 3일 동안 장안극장에서 상연되어 서울의 인기를 한데 뫃았는데 이를 널리 소개코자 조영의 ‘해방뉴스’는 22일 오후 4시 반부터 공연장인 장안극장 무대에서 이 연극 4막 5장 중 일부 장면을 수록하였다고 한다. .(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그 여자의 ‘사랑 니[치齒]’- 낙수첩]: 연극여우 모 여사를 모두 아직 어린아이라고 부른다. 여보 농담일망정 그런 말은 좀 사양하시오. 남편 있는 어린 아이가 어디 있단 말이오(모 여사는 예술인 모 씨와 동서하고 있음. 순직한 모 씨 정색으로 편을 드니 장본인인 모 여사 "엄마!”하고 입을 커다랗게 열었다. 보니까 아닌 게 아니라 어른이면 누구나 물론 나 있어야 할 ‘사랑 니[치齒]’가 아직도 날려면 까마득- "쨋! 이[치]도 제대로 나기 전에 시집을 가다니! ”하고 편 들은 순직한 친구 다시 한번 실망적 분개- 따는 "엄마”하고 고함치는 것으로나 시비의 ‘사랑 니[치]’ 안 날 것쯤으로는 이 시절 여성의 생리조건은 달라진 것 본인은 편들어주는 이를 오히려 원망하더라고?.(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미술= [해방 미전 출품목록] #조형= ‘수목樹木’ (이봉상李鳳商), 자기‘磁器와 소녀’ (유영무柳榮茂), ‘빨간 찬장과 아기’ (서강헌徐康軒), ‘시위示威’ (이병효李炳孝), ‘황폐’ (이규로李圭魯), ‘꽃’ (박상동朴商東), ‘풍경’ (엄도만嚴道晩), ‘말’ (조병덕趙炳悳), ‘자유상自由像’ (유석연柳錫淵), ‘ 들’ (김선재金載善), ‘일하는 청년’ (염봉진廉奉鎭), ‘정물靜物’ (윤자선尹子善), ‘한구풍경漢口風景’ (임군홍林群鴻), ‘풍경’ (이규호李圭皓), ‘풍경’ (박성규朴性圭) #건축= 조선주택개량안‘ (오영섭吳英燮), 선렬위령탑’ (손중모孫中模), ‘해방기념탑’ (안일수安日洙) #포스터= ‘신문화건설’ (한홍택), ‘포스터’ (이완석李完錫) (끝) .(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사진= [오대산 기록사진, ‘사예寫藝’서 일반공개]: 조선사진예술협회에서는 과반 조선산악회 주최의 오대산학술조사대에 참가하여 시종 기록촬영에 위대한 성과를 걷우고 귀환하였다는 바 금번 그 전 작품을 모아가지고 오는 10월 2일부터 1주일 간 서울 시내 동화백화점 갤러리에서 열리는 산악회 주최의 보고전에 일부로 사진부전으로서 일반 공개키로 되었다 한다. .(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극장= [국립극장 문제는 어디로? - 돌연한 합동통신과의 공동 경영설 대두로 이것을 거부하는 국극위원측의 귀추와 당국의 해결책 나하奈何? ] : 조선에 국립극장의 설립과 극장은 문화인에게라는 소리가 비등하여 그간 당국에서는 시내 16 적산 극장을 문화인 혹은 적당한 후보자 대여 입찰제를 채용 g하여 이를 실시키로 하여 일반이 주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간 문화인들로 조직된 심사단이 이미 입찰의 심사를 종료한지 수개월이 지나도록 당국에서는 이 심사결과에 대하여 하등의 구체적인 해결발표가 없어 매우 사계에서 주목을 끌고 있던 차 드디어 거 19일에야 비로소 국제극장만에 대한 해결을 지키기 위하여 경기도 재산관리처에서는 군정청 교화국 관계자와 국립극장 위원과 또한 의외로 등장된 동업 합동통신 경영자들을 초청하여 현 국제극장을 국립극장 위원측과 합동통신사측과 공동경영을 하여 달라는 제시가 있었다. 그런데 국립극장에 한 목 끼게 된 합동통신사에 대하여 국립극장측 관계자들은 즉시 이를 반대하는 한 편 이 합동통신사의 출현에 관한 경위를 규명하여본 결과 합동통신사는 최근 동사의 운영 관계 상 국제극장을 동사 배양기관培養機關으로 삼기 위하여 4분지 3의 운영권을 ‘앤더슨’ 경기도지사로부터 양해를 받았다고 주장하는데서 나오는 것이라 한다. 그런데 현재 도 당국에서는 국립극장 측과 합동통시 측과 합의하여 공동경영을 하여달라는 데 대하여 합동 측은 시초의 주장대로 ‘앤더슨’ 지사로부터 우리는 전기의 권리를 받았다고 고집하며 한 편 국립극장의 주장은 프로 편성 중 50% 상영은 ‘앤더슨’씨가 요구하여 왔기에 우리는 그것만을 합동통신과의 공동운영 이야기는 모른다는 주장인데 이리 되고 보면 국제극장만을 가지고서는 이 문제의 해결은 어려울 듯이 보인다. 이리하여 작 22일까지의 추세를 보면 국립, 합동 양측에서는 도 당국에 딴 의미의 의견서를 작성하여 제출하기로 되었다는데 이에 대한 당국의 제2목표는 과연 무엇일까? 그런데 작 22일 극장대여 입찰심사원 이서향씨와 국립극장 설립위원회 채정근 사무국장을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극장대여 입찰심사원 담: 극장 관계의 전 예술분야를 망라해서 성립된 극장대책위원회의 대표로 우리들 3인이 극장 입찰자 심사에 참가한 바이 있으나 우리들의 심사결과대로 낙찰이 되느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일반의 희망만으로서는 해결 안 되는 군정 당국의 처리여하에 있는 것인 줄 안다. 최근 국제극장을 놓고 국립극장 위원과 합동통신 양자 간에 마찰이 발생하고 있는 듯한데 여기에 대해서는 상식으로 생각해도 국제극장이 국립극장 위원회에 낙찰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점에는 다른 심사원들도 동일한 의견이다. 이러한 심사원 각자의 의견이 저번 종료한 입찰자 심사에 반영되었느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상상에 맡긴다. =국립극장 설립위원회 사무장 담 : 예술가들이 같은 이념에서 자기와 관계없는 통신사를 접수한다면 도 당국에서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우리들도 이와 같은 견지에서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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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67)김종욱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보다 제일 즐거운 일은 없다. 사실 상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것인지 확실한 대답도 못 얻고 이렇게 ‘헛개비’에 씌운 것 같이 남이 볼 적에는 그야말로 들떴다고까지 보겠지만 하여튼 즐거운 것은 틀림없다. 연극의 매력이란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연극을 보는 즐거움- 연극을 만드는 기쁨- ‘무대예연舞臺藝硏’에 입회한 나는 정말 생활을(생존이다)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한다. 요사이 이런 신흥연극의 집단을 통하여 작으나마 연극 생활을 하면서 지금까지의 자기 자신 연극에 대한 사랑이 통일하고 절대적이라고 자부하던 마음이 점점 의심이 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유희본능에서만 고치려는 타성惰性이 싫어진 것이다. 이것은 축지소극장 내 화장실에서 본 바의 이야기인데 자기의 모든 생활을 극장에 바치고 사상의 전부 감정의 전부를 연극에다 쓰고 과거의 신극의 길에 봉사하던 사람이 그때 우리들(연극학도)과 같이 조연하고 있는 것을 보고 특히 자기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또 자기의 자식까지도 데리고 와서 화장을 하고 있지를 않았나. 父子 동반의 조연 연극을 하였기 때문에 생활에 짓눌리고 생활의 고통을 받아도 또 연극을 한다는 이런 연극을 아니 하고는 못 배기는 마음 얼마나 존귀하고 거룩한 심정일까? 이러한 자각이 각오가 나에게 있는가 묻는다면 아무 말도 못할 것 같다. 그저 나는 그런 힘이 끊임없도록 원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연극의 길은 가시덤불의 길이라 성공이 없는 길이라 가진 곤란과 또 대폭풍을 예상할 때 연극의 연구를 그만두는 것이 어떠냐고 유혹을 받았다고 해서라는 곧 단념을 하고 방향전환을 할 것인가. 아니다. 연극의 길이 아닌 곳에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오. 연극보다 더 매력 있는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연극도 혁명에의 일이다. 고연 이런 예술에 봉사하며 이런 예술을 위하여 희생이 되겠는가? 그저 덮어놓고 연극은 예술이다라는 관념만으로 지금껏 자기의 입장 태도 및 회의적인 사고가 적었음은 솔직히 고백한다. 이것이 과거 선배 제형의 말씀이 진의미를 못 일아 들은 원인의 하나인 것이다. 새로운 사회를 위하여 새로운 연극의 창조를 염원하는 연극학도들의 동지가 서로 손을 마주 잡고 새로이 돌진하여가려는 이때에 이러한 연극 이전의 것이지만 이것이 곧 연극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반성한다는 것이 적었음을 후회한다. 더욱 앞으로 나가려고 하고 있으나 정작 목표를 어디 다 둬야 하느냐가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연극이란? 라고 나는 곧 누구한테든지 묻고 싶다. 그러나 먼저 나 자신이 그 답을 이해할만큼 자라났나가 의문이다. 나는 깊은 연극학자는 알아도 무대의 실천가가 되고 싶다. 인민 대중앞에 아니 속에 들어가는 무대의 투사가 되고 싶다. 그것을 위한 연구이다. 혹인은 너는 연극이전의 것을 많이 깊이 생각함이 좋다라고 말하였다. 연극 이전의 것이란 또 무엇인가? 나에게는 크나 큰 문제였다. 그것이 이즈음의 ‘무대예술’의 연극생활에서 감득하고 이해(자기 정도로)할 수 있게 되었다. 우라들의 ‘모토’- 진실 탐구가 말하고 있지 않나. 진실의 탐구- 이것은 비판을 의미하며 진실을 사모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이 연극이전의 것이 아닌가? 연극정신의 원천이 아닌가? 나는 곧 또 ‘연극정신이란 무엇인가?’ 라고 수박 겉핥기로 정의를 내리고 싶다. 이런 것이 정의를 내림으로써 체득할 문제인가? 요사이에 나는 이것은 여하히 넓게 책을 읽었다 치더라도 양으로서 도저히 알 수 없는 질의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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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66)김종욱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보다 제일 즐거운 일은 없다. 사실 상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것인지 확실한 대답도 못 얻고 이렇게 ‘헛개비’에 씌운 것 같이 남이 볼 적에는 그야말로 들떴다고까지 보겠지만 하여튼 즐거운 것은 틀림없다. 연극의 매력이란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연극을 보는 즐거움- 연극을 만드는 기쁨- ‘무대예연舞臺藝硏’에 입회한 나는 정말 생활을(생존이다)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한다. 요사이 이런 신흥연극의 집단을 통하여 작으나마 연극 생활을 하면서 지금까지의 자기 자신 연극에 대한 사랑이 통일하고 절대적이라고 자부하던 마음이 점점 의심이 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유희본능에서만 고치려는 타성惰性이 싫어진 것이다. 이것은 축지소극장 내 화장실에서 본 바의 이야기인데 자기의 모든 생활을 극장에 바치고 사상의 전부 감정의 전부를 연극에다 쓰고 과거의 신극의 길에 봉사하던 사람이 그때 우리들(연극학도)과 같이 조연하고 있는 것을 보고 특히 자기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또 자기의 자식까지도 데리고 와서 화장을 하고 있지를 않았나. 父子 동반의 조연 연극을 하였기 때문에 생활에 짓눌리고 생활의 고통을 받아도 또 연극을 한다는 이런 연극을 아니 하고는 못 배기는 마음 얼마나 존귀하고 거룩한 심정일까? 이러한 자각이 각오가 나에게 있는가 묻는다면 아무 말도 못할 것 같다. 그저 나는 그런 힘이 끊임없도록 원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연극의 길은 가시덤불의 길이라 성공이 없는 길이라 가진 곤란과 또 대폭풍을 예상할 때 연극의 연구를 그만두는 것이 어떠냐고 유혹을 받았다고 해서라는 곧 단념을 하고 방향전환을 할 것인가. 아니다. 연극의 길이 아닌 곳에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오. 연극보다 더 매력 있는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연극도 혁명에의 일이다. 고연 이런 예술에 봉사하며 이런 예술을 위하여 희생이 되겠는가? 그저 덮어놓고 연극은 예술이다라는 관념만으로 지금껏 자기의 입장 태도 및 회의적인 사고가 적었음은 솔직히 고백한다. 이것이 과거 선배 제형의 말씀이 진의미를 못 일아 들은 원인의 하나인 것이다. 새로운 사회를 위하여 새로운 연극의 창조를 염원하는 연극학도들의 동지가 서로 손을 마주 잡고 새로이 돌진하여가려는 이때에 이러한 연극 이전의 것이지만 이것이 곧 연극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반성한다는 것이 적었음을 후회한다. 더욱 앞으로 나가려고 하고 있으나 정작 목표를 어디 다 둬야 하느냐가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연극이란? 라고 나는 곧 누구한테든지 묻고 싶다. 그러나 먼저 나 자신이 그 답을 이해할만큼 자라났나가 의문이다. 나는 깊은 연극학자는 알아도 무대의 실천가가 되고 싶다. 인민 대중앞에 아니 속에 들어가는 무대의 투사가 되고 싶다. 그것을 위한 연구이다. 혹인은 너는 연극이전의 것을 많이 깊이 생각함이 좋다라고 말하였다. 연극 이전의 것이란 또 무엇인가? 나에게는 크나 큰 문제였다. 그것이 이즈음의 ‘무대예술’의 연극생활에서 감득하고 이해(자기 정도로)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들의 ‘모토’- 진실 탐구가 말하고 있지 않나. 진실의 탐구- 이것은 비판을 의미하며 진실을 사모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이 연극이전의 것이 아닌가? 연극정신의 원천이 아닌가? 나는 곧 또 ‘연극정신이란 무엇인가?’ 라고 수박 겉핥기로 정의를 내리고 싶다. 이런 것이 정의를 내림으로써 체득할 문제인가? 요사이에 나는 이것은 여하히 넓게 책을 읽었다 치더라도 양으로서 도저히 알 수 없는 질의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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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65)김종욱 ‘선착 100명 한 초대장 진정’: 본사 정례 제5회 특별초대시사회를 오는 26일(월요) 오전 9시 반 정각부터 시내 국제극장에서 개최한다. 작품은 기旣히 본 지상에 소개한 바 있는 금차 대전의 장편영화 진주만의 폭격으로부터 ‘카이로’ 회담까지의 기록을 집성한 미 육해군성 정보부 제작 전 우리 말 판 ‘世界第2차대전’ 6권이다. 초대는 예에 의하여 신문관계자에 한하나 본지 독자로서 선착 백 명 한 초대한다. 신입은 황금정 2정목 199(일본생명 옆 3층 빌딩) 본사에 내참하면 된다.(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조선영화의 고뇌: 서광제 문학은 신문 잡지 기타 출판물을 통해서만이 문학 활동을 할 수 있고 또 연극은 희곡에 그치지 말고 무대 상연이 있음으로써 연극활동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말인데 그러려면 영화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영화 그 물건이 스크린에 상영됨으로 영화활동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해방 후 1년 간 조선영화동맹이 민주주의 노선을 쫓아 다대한 활동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것은 일반적 의미에 있어서 새로운 조선건국에 있어서의 광범위의 문화운동의 일부분이었을 것이며 결코 만족할 만한 영화운동의 전부는 아니었을 곳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만족할만한 영화운동은 무엇일까? 다시 말할 것도 없이 영화제작 활동일 것인데 이것은 잔인한 일제의 조선문화 탄압으로 인하여 아무런 영화 생산적인 기계 문화유산을 남겨놓지 못한 까닭에 조선영화의 고뇌는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해방 후 극계를 보면 해방 초기에 그들은 하고 싶은 연극을 어느 정도 마음껏 해보았다. 그리고 현재에 있어서는 상연물 자체의 저조와 극단 자체의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다.‘ 극단 자체가 위기에 서고 연극인의 최저생활 보장까지도 협위脅危를 맞게 된 것은 여러 가지의 주관적 객관적 이유가 있겠으나 나는 솔직히 이 자리에서 같은 예술가로써 지적하고 싶은 것은 연극인 자신의 ‘신세리티’의 결여와 근시안적 연극행동에 다분히 있지 않았는가를 말하고 싶다. 그러면서도 우리 영화인은 연극인들의 연극 활동을 부러워했고 영화가 가진 ‘매카니즘’을 다시 탄식했던 것이다. 해방 후 1년, 우리 영화인 총의總意(물론 진보적 영화인)에 의한 작품 하나를 갖지 못한 것은 조선 문화의 빈곤 을 여실히 말하는 것은 물론이겠지만 이럴수록 우리들은 이러한 문화적 빈곤을 가져올 우려가 있는 모든 봉건적 잔재와 일제적 잔재와 새로이 약동하는 ‘파쇼’를 적극적으로 또는 용감히 파쇄시키는 데 전력을 다 해야 하며 우리는 좁은 의미의 영화 문화 발전을 위해서 안으로 우리의 역사적인 노선인 민주주의 민족문화 건설을 방해하는 일체의 반동세력과 과감히 투쟁해야 한다.(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초추의 은막 미 영화 3편]: ‘카사브랑카’,워너 영화) , ‘최후의 지옥선’(파라마운트 영화), ‘ ’저주의 집‘ (파라마운트 영화) ** 내용 생략 ** .(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전국 영화인대회 경과]: 이남 영화인 제1회 정기대회는 애정과 같이 일작 20일 오후 2시부터 시내 황금정 2정목 영화동맹회의실에서 영화인 50여 명 참석 하에 상영되었다. 회의는 검열제의 외국영화 독점 수입을 반대할 것. 미소영화인에게 보내는 메시지 결의 통과 등이 있었으며 동맹의 조직을 일층 강화할 것을 전제로 종래의 위원장제를 폐지하고 새로이 중앙위원으로 최고 결의 집행의 결의제를 채택하는 등 진지한 토의가 있은 다음 동 6시에 산회하였는데 이날 개선된 위원은 다음과 같다. 서기장 추민秋民, 중앙집행위원 이병일, 서광제, 김정혁, 이재명, 박기채, 강신웅, 이창용, 이기성李基星, 민정식閔政植, 문예봉, 윤상열尹相烈, 김한, 성동호, 이기환, 독은기, 허달, 추민 .(藝術通信 270호. 1946년 8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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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64)김종욱 검열 월일 제명 소유자 8. 10 ‘잠꼬대 뽀빠이’ 중앙영배 同 ‘조선자造船者 미키마우스’ 동 洞 ‘전후戰後’ 공보부 (藝術通信 269호. 1946년 8월 21일) =미술= [미술단체 합동 진보-진척-!] : 조선조형미술동맹과 조선미술가동맹과 이 두 단체기 합동에 관한 준비를 착착 진척 중에 있다 함은 누보한 바 있거니와 양 단체에서는 드디어 합동문제에 관한 기술적 기타 여러 가지 구체안이 성립되었으므로 今 21일 오후 2시부터 시내 정동정貞洞町 이화고녀 강당에서 양 단체 합동 제1차 준비위원회를 개최한다는 바 이 회의의 동향이 크게 주목된다.(藝術通信 269호. 1946년 8월 21일) [미전 초일 관객 1만명 돌파] : 종합문화 대전람회의 뒤를 이어 조선미술가동맹과 조선조형미술동맹 급 조각가협회의 합동미술전은 예정대로 작 20일부터 26일 까지 1주일 간 시내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개최되어 초일의 래람자來覽者 1만 여명을 돌파하여 전례없는 대성황을 이루고 있는데 출품작명과 작자는 다음과 같다. # 미동 = ‘남산’ (김령교), ‘비등’(이순종李純鍾), ‘피고 피고’ (이인성), ‘ 여운형선생’ (윤형렬尹亨烈), ‘자유에 주렸던 무리’ (오지삼吳智三), ‘서울운동장으로’ (이춘남李春男), ‘소묘’ (채남인蔡南仁), ‘ 작품 제5호’ (최은철崔恩哲), ‘아침’(손영기孫英奇), ‘여름의 오후’ (유성연柳成淵), ‘출로’ (박찬식), ‘ ’출발‘ ’벽보활동‘ (박진명朴振明), ’실업失業' (김각열金珏烈), ’ 요물妖物‘ (김관현金寬鉉), ’비판‘ (박래용朴來龍), ’만추晩秋‘ (조남표趙南杓), ’인물‘ (이동일李東日), ’안顔‘ (이인구李麟九), ’정물靜物‘ (김금배金錦培), ’춘일春日‘ (이성준李成俊), ’고등어‘ (조관형趙寬衡), ’ 무희舞姬‘ (이세득李世得), ’인물습작‘ (윤흥섭尹興燮), ’한정閑庭‘ (박상옥朴商玉), ’소년‘ (박노양朴魯陽), ’산‘ (조국환趙國煥), ’후부상後婦像‘ (김승옥金承玉), ’풍경‘(박동朴同), ’ 부인상婦人像‘ (김순배金舜培), ’호응呼應‘ (기웅奇雄), ’습작‘ (박수천朴壽天), ’전위前衛‘ (박문원朴文遠), ’훈장‘(이주홍), ’인물‘ (김진항金鎭恒), ’고 윤전사尹戰士-봉길奉吉 초상- ‘ (김일봉金一峰), ‘나체’ (박승근朴昇根), ‘농촌의 아침’ (구본영具本英), ‘운雲’ (김영희金永熙), ‘직흥直興’(변영원邊潁源) =조형= ‘건어乾魚’ (이석주李奭柱), ‘초상’ (방덕천邦德天), ‘자광慈光’ (김백학金伯鶴), ‘산’ (신홍휴申鴻休), ‘고 윤전사 봉길 초상’(김일봉金一峰), ‘회화’ (이계상李揆祥), ‘거리 풍경’ (박득순朴得淳), ‘생生’ (김만형金晩炯), ‘풍경風景’ (최재덕崔載德), ‘마포강麻浦江 선창船艙’ (김각한金珏漢), ‘일년감一年柑’ (유경채), ‘백일홍’ (정온녀), ‘봄’ (안기풍安基豊), ‘백두白頭’ (김혈수金血洙), ‘ 8. 15의 기록’ (박영선), ‘산’ (김찬희), ‘붉은 모자’ (이건표李建杓), ‘소녀’ (이해성李海晟), ‘해방기념’ (한홍택韓弘澤), ‘풍경風景’ (현충섭玄忠燮), ‘풍경’ (길진섭), ‘환희’ (천지민千支民), ‘불상’ (이수억李壽億), ‘인물’ (손일현孫日鉉), ‘석양’ (정종녀), ‘탈’ (이석종李碩鍾), ‘화花’ (김진황金振璜), ‘환무歡舞’ (김기창), ‘군상’ (정완섭鄭完燮), ‘평화’ (박래현), ‘사색’(주예순朱藝珣), ‘수국水菊’ (문원文園), ‘소녀’ (조병현趙炳賢) (藝術通信 269호. 1946년 8월 21일) [자칭 화가가 지폐 50만원을 위조]: 시내 동사헌정東四軒町 48에 거주하는 화가 김걸金傑(31)은 지난 16일 5인조 50만원 지폐 위조사건으로 경기도 경찰부로부터 검거되어 목하 엄중한 취조를 받고 있는데 작日 장 제일관구 경찰청장의 발표에 의하면 김은 그간 공범자인 4명과 결탁하여 50만원의 위조지폐를 발행하여 그중 10만원을 김의 가족을 시키어 정화正貨로 교환하고 224, 850원을 검거 당시의 경관에게 압수당하고 그 밖에 20만원을 파훼破毁한 것이 판명되었다고 한다.(藝術通信 269호. 1946년 8월 21일) =극장= [서울 시내 극장 동원표(17. 18일)] 극장 제명 입장인원 국제 영화 ‘자유를 우리에게(제6일) 1900 국도 낙랑극회, 서울관현악단 (제5일) 633 수도 영화 ‘아부라함 링컨’ (제1일) 3676 중앙 극단 청춘극장 공연 (제6일) 371 서울 영화 ‘진주의 목거리’ (제1일) 891 장안 농아극장 공연 (제1일) 589 제일 백조, 백민, 태평양 합동 공연 (제1일) 578 단성 극단 민예 공연 (제6일) 328(藝術通信 269호. 1946년 8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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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63)김종욱 문학의 대중화를 급속히 촉진시키고자 8월 10일 결성된 조선문학가동맹 서울 시 지부는 위원장에 김기림씨, 부 위원장에 조벽암, 박노갑, 허준 3씨와 집행위원장으로 박태원 씨 이하 46명을 선거했던 바 금반 다시 서기국 부서와 각부 위원을 다음과 같이 결정, 제반사무에 착수했다고 하는데 서울 시 지부의 결성으로 말마아마 동맹 본부의 사무는 중앙집행위원회와 자방 사무만이 남고 기타는 전부 서울 시 지부에서 처리하기로 되었다 한다. # 서기국 부서= 서기장 金永錫, 총무부장 이진영李振榮, 사업부장 김상원金相瑗, 조직부장 배호裵澔, 출판부장 지봉문池奉文, 선전부장 이용악 # 각부위원= 시부 위원장 김광균, 위원 임원호任元鎬, 정지용, 조허림, 노천명, 김상원, 권환, 설정식, 윤태웅, 여상현, 이흡, 오장환, 이용악, 김철수, 박아지, 소설부 위원장 현덕, 위원 계용묵, 김남천, 김학철, 지봉문, 김만선, 박영준, 박찬모, 박계주, 홍구, 윤세중, 채만식, 박태원, 이선희, 지하련, 곽하신 평론부 위원장 임화, 위원 이원조, 이명선, 김동석, 배호, 송완순, 안영일, 박치우, 김태준, 나선영羅善榮 희곡부 위원장 함세덕 위원 이서향, 김태진, 박영호, 조영출, 김이식金二植, 김건金鍵(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문화= [종합문화전람회 대호평리에 폐장]: 지난 12일부터 동화백화점에서 벌려진 종합문화전람회는 관람자 6만여라는 기록을 세우고 작 19일로 호평리에 끝났다.(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인사] 박진명朴振明씨(미술동맹 서기장) 8. 15기념 미전 개최 인사차 래사 김두수씨 (한성극장협會 발기준비 인사차 래사 (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연극= [소인극운동에 대한 의견서 (4)]: 조선연극동맹 서기국 발표 5. 경비 상업극단은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연극 같으면 소인극은 경제적 이익을 목적치 않는데 그 특질이 있고 어데 까지든지 공공적인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고로 입장료도 없는 것이 좋으며 직장원의 성의와 관심으로 공연을 가질 것이로되 그것도 무리해서 공연을 가질 필요는 없다. 다만 전 직장원의 성의의 결과로서 공연을 기획할 것이며 순수한 의미로서 유지일동의 기부를 받아서 공연을 갖는 것이 옳다. 이런 의미로서는 일상생활에 있어서 소인극 관계자는 모범적인 행동을 취할 것이며 직장에서나 농촌에서나 소인극에 관계있는 사람 같으면 자연 신賴와 존경을 받아 그 사람들의 계확이면 스스로 기부를 내게 되도록 인격의 정야靜冶가 있어야 될 것이다. 이것이 소인극가진 건전한 생활심리의 배양이라 할 수 있다.(藝術通信 269호. 1946년 8월 21일) [극단 ‘민예’ 연출을 유치진 씨 담당]: 극단 ‘민예’는 차회 공연으로 이광래 작 ‘피리 부는 처녀’'(4막 5장)에 착수하리라 한다. 그리고 특히 공연에는 오래 침묵 중이던 유치진씨가 연출을 담당하기로 되었다 한다.(藝術通信 269호. 1946년 8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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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62)김종욱 최근 예술단체 간의 합동문제가 날로 비등되어 사계의 많은 주목을 이끌고 있던 차에 조형미술동맹에서는 18일 오후 3시부터 시내 서울신문사 회의실에서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조선미술가동맹과의 합동문제에 관하여 토의한 바 금 20일부터 개최되는 ’조형‘ ’미동‘ 양 단체의 합동미술전을 계기로 이 전람회가 끝나기 전에 정식으로 합동이 체결되도록 주선할 것을 결의하는 동시에 즉시 합동 준비위원을 선정하고 동 6시 반 폐회하였는데 이날 선정된 준비위원은 다음과 같다. 윤희순尹喜淳, 길진섭吉鎭燮, 김기창金基昶, 유석연柳錫淵, 정종여鄭鍾汝, 정현웅鄭玄雄, 최재덕崔載德, 이석성李錫成, 이완석李完錫, 서강헌徐康軒, 이 d성李ㅇ晟 (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8. 15 기념작품전]: 태백미술원에서는 단독으로 개최 예정이든 8, 15 기념향사에 관한 최초의 계획을 변경하여 이번에 조선공예가협회와 합동으로 미술전을 지난 16일부터 1주일 간 시내 본정 2정목 태백서적공사(구 환선) 3층 화랑에서 개최중 일반에 많은 호평을 받고 있는데 그 출품작과 작자 씨명은 다음과 같다. 마술부= ‘물레방아’ (정홍거鄭洪巨), ‘시작試作’ (장우성張遇聖), , ‘양주풍경楊州風景’ (김영기金永基), ‘취가조吹哥鳥’‘(조용승曺龍承), ’배‘(장우성), ’환성歡聲‘ (박원수朴元壽), ’노도蘆渚‘(배렴裵濂), ’소‘ (이응로), ’국화國華‘ (金永基), ’의기선생義基先生‘(이유태李惟台), ’봄‘(박원수), ’나비‘ (정진철鄭鎭澈) 공예= ‘연못가의 하루’(윤봉숙尹鳳淑), ‘성기盛器’ (백태원白泰元), ‘틀 풍경’ (윤봉숙),‘ 도소합陶小盒’ (김재석金在奭), (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조선미술가동맹 이전] : 조선미술가동맹- 무교정 6번지(전 극단 ‘청포도’ 적跡)로 이전(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 문학 = [뉴욕 대학 교수 강용흘씨 귀조]: 3. 1운동의 민족적 반일투쟁을 주제로 한 ‘초당草堂’이라는 소설을 해외에서 출판하여 이제부터 우리에게 존경을 받아온 강용흘씨가 이번에ㅡ30년 만에 귀국하였다. 씨는 일제의 악정이 바야흐로 조국에 허물어들기 시작하자 표연飄然히 조국을 하직하고 1919년 만주, 중국, ‘캐나다’ 등지를 거쳐 동 22년에 미국으로 들어갔었다. 그런데 그동안 씨는 미국의 ‘허버드‘ 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후 ’콜럼비아‘ 대학의 동양학 강사와 ’뉴욕‘ 대학의 문과교수로 장년 조선을 위하여 활약하였으며 이동안 세계를 놀라게 한 ’춘향전‘의 소개로도 찾은 것이다. 그러한 씨가 거去 17일 인천항에 미군 정부의 중요임무를 띄우고 환국하여 작일 오전 10시 미 군정청 기자단과 회견하고 환국의 인사소감을 피력한 바 잇는데 특히 씨는 왕방한 기자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나는 수개월 내지 1년 간 조국에 체재하여 전연 정치적 문제에는 ‘터치’ 않고 순수한 우리 문단 특히 미술을 외국에 소개하고자 한다. 그리고 나의 작품으로는 ‘초당’과 ‘동양이 서양으로’가 있고 또 최근 집필을 마친 장편문학론으로 ‘20세기 문학’ 이 있다. 입경한지 불과 몇 일 되지 않아 아직 여장을 끌르는 참이니까 생소한 것뿐이어서 자세한 것은 후일 말하겠다.”(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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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61)김종욱 시내 모 극장에서 일어난 넌센스1 그날은 마침 8. 15 해방 1주년기념일인 관계인지 대만원을 이루었다. 영화가 끝나고 악극단이 나설 차례인데 시연의 벨이 울린 지가 20분 지나도 막은 올리지 않는다. 이쯤 되면 의례 있는 일이지만 관객석에선 휘파람 질, 손뼉, 함성, 심한 것은 욕설까지 퍼붇는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제야 막이 올랐다. 뒤집힐 듯 하던 장내도 진정 되었다. 한데 여기까지면 좋을 터인데 마침 무대에 나타난 괴상스런 여가수 때문에 또 말썽- 아무리 잘 보재도 얼굴은 괴상怪相 그것인데 몸단장도 흉물한데 발에 신은 ‘실버 슈즈’가 드디어 제2의 소란을 야기시키고야 말았다. 하기는 무대인 성장의 한 가지인 은구두가 그처럼 도화선되는 것도 싱거운 일일 터이나 "야- 저 은구두 보게. 저것 찾아 신고 나오느라고 늦었지. 구두 값이 얼굴값보다 더 비싸겠네! ” 이쯤 되고 보면 첩자帖子도 고소苦笑 외에 별도리 있었으랴. 결국 악극단 여가수 되려면 노래보다 연기보다 얼굴 편이 낳아야 팬은 용이할 건가! (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청우대] 다시 예술인의 시간관념에 대하여 일언一言 진상進上. 저명 연극인 하루 아침 열 한 시 가량 그제야 기침하여 대문 밖에 나갔더니 왠 악극 청년들이 찾아와 " 이 근방에 XX악단 선생 댁이 있다는데 혹 선생께서 아십니까?”하고 묻는 것을 "그런 부류 사람하고 난 다르오. 모르오.”하고 외면하였겠다. 악극도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느냐? 없느냐? 는 잠시불문하고라도 이 저명 연극인의 일갈성으로 악극보다 연극이 우위의 예술이며 따라서 악극인보다 연극인이 진성 예술가 됨을 위선 수긍하기에 주저할 자 어찌 있으랴? 한데 그 다음 어느 연극인과 악극인의 동석하여야 할 좌석에 마침 그 일갈의 저명 연극인과 그 안짐의 악극 청년들이 공교롭게 만나게 되었는데 아침이면 11시 기침의 저명인이 정각보다 늦게 한 시간 반 만에야 출현하자 "우리는 이렇게 시간관념이 없는 부류와는 예술을 아야기할 수 없소! ” 하고 보기 좋게 일갈퇴석退席했다.고-. 이리 되고 봄에 후자는 확실히 전자의 보복적 감정이라고 하여둘 제 전자는 우월만의 일갈적 지위만을 조속히 차릴 줄 알았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시간이행에 대해선 거의 마비적으로 체면화시켰기 때문에 이 창피를 기어히 받은 것. 이 두 토막의 얘긴 예술가들이의 시간관념을 논하는데 트집 같기도 하나 요는 예술가이니까 선술집 바-에서 밤을 세워도 묵인되고 회합시간을 안 되어도 되리라는 신식체면은 없으리라. 상하를 일갈할 영광된 우월을 그야말로 이 부류들은 거꾸로 삼김이 아닐꼬.(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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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60)김종욱 소인극의 지휘자는 혹 도회지에서 연극에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 지도자가 되었다는 사람이라고 그 지도자가 되어서는 소인극단을 잘 돠는 방향으로 과인誇引하기가 쉽다. 소인극의 이념을 잘 알고 지도를 하면 좋으나 자기가 경험한 바 있어 이 모임에서 좌장의 노릇을 하거나 또는 소인극 단체에서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 예술지상주의적 운동을 강제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고로 이 운동의 지도자는 연극에 경험이 없더라도 일상의 생활 태도가 훌륭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사람이며 따라서 문화운동에 이해력을 가진 사람이면 이상적인 지도자다. 연출 연기 장치 등의 기술문제에 있어서도 직업극단의 배우를 초빙한다든가 일류 연출가의 강의를 듣는다든가 하는 것도 십분비판하여 전문가의 기술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소인극 운동에 필요한 기술만 취한 것임을 충분히 주의하여야만 된다.(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조선 최초의 농아극 ‘남 모르는 사상’ 상연]:극단 ‘농아극장’ 처녀공연이 정동섭鄭東燮 작 겸 연출 ‘남 모르는 사상’ 4막 5장은 드디어 작 19일부터 23일까지 5일 간 시내 장안극장에서 볼 수 있었으나 조선에서는 이번이 최초 공연인만큼 관계자 측에서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영화= [금일 영화인대회]: 그간 준비 중이던 이남 조선영화인대회는 드디어 금 20일 오후 2시부터 황금정 2정목 영화동맹 회의실에서 개최한다.(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영화 검열보] 검열 월일 제명 소유자 8. 9 ‘광명의 명일’ 공보부 동 ‘백의천사’ 동 동 ‘날개 달린 재앙’ 동 동 ‘레테 작전’ 동(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극장 = [서울 시내 극장 동원표(17, 18일)] 극장 제명 입장 인원 국제 영화 ‘자유를 우리에게’ (제4일)2697,(제5일) 4633 국도 낙랑극회, 서울관현악단(제3일) 1378, (제4일) 2034 수도 극단 삼천리, 토월회 공연 (제3일) 789 (제4일)1578 중앙 극단 청춘극장 공연 (제4일)470 (제5일) 701 서울 영화 ‘해적’(제3일)1666 (제4일) 1098 장안 영화 ‘모험의 왕자’ (제3일) 400 (제4일) 599 제일 영화 ‘청춘난무’ (제4일) 423 (제5일) 650 단성 극단 민예 공연 (제4일) 370 (제5일) 604(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금주 프로] 국제 21-27 극단 황금좌 공연 국도 22- 28 영화 ‘추억의 노래’ 수도 19- 26 영화 ‘아부라함 링컨 전’ 중앙 21- 26 악극단 새별 공연 서울 19- 21 영화 ‘진주의 목거리’ 장안 19- 21 극단 농아극장 공연 제일 19- 24 영화 ‘조선의용군’ 단성 20- 26 영화 ‘밀림의 포아’(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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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59)김종욱 시비를 삼자니 지금쯤 너무 창피스런 일이요. 그렇다고 냄새나는 양 그대로 뚜껑을 닫아두자니 진물이 흐르도록 꾸역꾸역 색이 날 노릇! 어차피 창피함에도 그를 끄집어내자면 소위 조선 유일이오 일류가 아니라 했다간 양단 난 모 교향악단원들의 연주할 때 착복하는 의장제가 그것! 반드시 예복을 갖춘다든가 고급의장을 차리라 함이 아님은 아무리 음악에 문외한인 손자도 계산하고 고대 들 일. 와이셔츠 바람으로 팔 소매를 걷우고 나서는 용사가 있는가 하면 노타이 잠뱅이 ‘씨옷 팬츠’로 대어든 경쾌한 친구도 있으렷다. 하기는 한 편에 제법 넥타이까지 정장한 예의가禮儀家도 있고- 하여간 이리 제멋대로의 치장治裝이니까 점잖지 못한 편의 소리도 제멋대로라는 야료를 받아도 탄할 수 없는 일. 그뿐인가 요전번엔 연습피로인가 뒷켠에 앉은 - 씨 그 길죽한 놈을 안은 채 태평천하의 기지개까지 터뜨렸겠다. 자, 이렇게 되고 보니 방석을 차 던지고 나올 밖에..... 기술도 기술이려니와 위선 적으면서도 결코 적지 않은 이런 폐단부터 주간主幹선생 시정하시오.(藝術通信 267호. 1946년 8월 19일) =연극= [무대예술법 실시에 ‘연동演同’ 전면 반대 표명]: 조선 무대예술의 질적 향상과 그 보호책으로서 무대예술법이 입법화한다는 것은 빌표 이후 각계에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그동안 그 결과에 주목을 끌고 있던 중 금반 관계단체 중 연극동맹에서는 지난 14일 상임위원회에서 선출한 예술법 대책위원회에서 신중히 검토한 결과 검열제도법 등의 이유로 법안의 전면적 거부로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고 하는데 그 후 동회에서는 이서향, 박영호, 김태진, 함세덕, 이강복李康福 제씨가 대표로 관계 당국을 방문하여 동 법안의 절대반대를 구두로 진술한 바 있었다는데 동 대표 이서향씨는 그 거부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예술을 위한 법령으로 그 발전 향상을 의도한 것이라면 우리는 쌍수로써 찬성할 수 있으나 이번 작성될 동 법안은 결과적으로 보아 예술행동을 제약하고 억압할 가능이 있는 것으로 동법에 제정된 심의위원회와 사전검열 등의 제도는 흡사 왜정 때의 연극문화협회의 그것과 조금도 틀림이 없다. 특히문교부가 극장 결정을 진다는 것에 있어서는 협회시대 그대로이며 더구나 검열 부흥은 언어도단이다.” 이상과 같이 동 법안의 모순을 지적하였다. 그런데 여기에 당국측에서는 어느 정도의 수정으로 재타협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당국 측에서도 함구무언이므로 추측키는 어려우나 좌우간 동법의 실시만은 거의 결정적인 것으로 今後의 귀추가 주목되는 바이다.(藝術通信 268호. 1946년 8월 20일) [소인극운동에 대한 의견서(3)]: 조선연극동맹 서기국 발표 =3. 각본선택의 방법=소인극에서는 각본의 선택이 대단 중요한 문제다. 흔히 체험하는 일인데 직장 농촌 등에서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나 연극 애호가들의 취미. 흥미로서 각본을 선택하는 일이 많으니 그는 대단 잘못이다. 그렇다고 교화적敎化的인 각본을 선택하는 것은 더욱이나 안 될 일이다. 그럴 때에는 직장에 있는 조합원이나 또는 가운데에서 일상생활 인격상으로나 교양交讓으로서나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 있다면 이런 사람들과 같이 소인연극의 문예부를 담당하는 문예부원 수명이 모여서 각본 선정위원회같은 것을 구성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물론 전문 극작가의 작품 중에서 적당한 것을 취하는 것도 좋으나 될 수만 있으면 공장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든가 선배 기술가들의 고심담이라든가 농촌에서는 향토의 전설 또는 향토가 낳은 애국지사의 위대한 모습이라든가를 문예부원이 직접 쓴 작품을 상연하는 것이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기술적으로는 떨어진다손 치더라도 공장원이나 마음 사람들의 생활에 적합한 문제를 취급하는 데에서 전문 극작가에서는 볼 수 없는 독창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소인극의 특성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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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58)매삭 1원씩 받아가던 라듸오 청취료가 일약 10원씩 10단도로 인상 실시되었다. 인상 이유인즉 경영유자의 곤란인데 현하의 물가고로선 금액의 고하는 불문코 ‘무리없으리라’는 것이 일반의 공론! 한데 청취료의 인상 실시 이면엔 방송 당국이 우리 연주 예술가들의 보수에도 그만침 상당한 대우개선이 응당 고려되었으리라고 믿고, 그 인상율을 타진하였더니 이것은 천만에 말씀! 청취료를 체신 당국이 하는 것이지 방송국으로선 이번 예산과는 관계 없고 따라서 연주료도 종전대로 실시 중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체 우리 예술가들의 방송료는 얼마나 들어왔는가? 그것을 여기에 소개하면 아래와 같은 것이다. # 방송극= 원작료 300원, 연출료 2백원, 출영 매인당 100원 # 강연= 취미, 가정, 어린이 시간 각 1회에 80원 # 독창= 100원 # 야담= 150원 물론 이상은 최고율인데 배우 한 사람이 일야 도보徒步출연에 2백원, 전차권 요금으로 출연하는 것도 기특하거니와 독창하는 예술가가 야담보담 싸게 대우 받고 출연한다는 것도 또한 가상할 노릇이다. 참고 삼아 이승만 박사의 강연 방송엔 얼마씩 드리느냐고 물었던 바 군정청에서 편입하는 프로는 방송국에선 지불치 않는다고 말한다. (藝術通信 267호. 1946년 8월 19일) =극장= [서울 시내 극장 동원표(16일)] 극장 제명 입장 인원 국제 영화 ‘자유를 우리에게’ (3일) 3942 국도 낙랑극회, 서울관현악단(2일) 1378 수도 극단 삼천리, 토월회 (2일) 585 중앙 극단 청춘극장 공연((3일) 501 서울 영화 ‘해적’ (2일) 1201 장안 영화 ‘모험의 왕자’ (1일) 572 제일 영화 ‘청춘난무’ (3일) 520 단성 극단 민예 공연 (3일) 509(藝術通信 267호. 1946년 8월 19일) [금주 프로] 국제 21- 27 극단 황금좌 공연 국도 22- 28 영화 ‘추억의 노래’ 수도 19- 26 영화 ‘아브라함 링컨’ 중앙 21- 27 악극단 새별 공연 서울 19- 24 영화 ‘진주의 목걸이’ 장안 19- 24 농아극장 공연 제일 19- 24 영화 ‘조선의용군’ 단성 20- 26 영화 ‘밀림의 포아砲兒’ (藝術通信 267호. 1946년 8월 19일) [극장협회가 중심으로 경기도 전도협회를 발기, 금월 중에 발기대회 소집] 한성극장협회에서는 목하 문교 당국에서 기초 작성 중에 있는 무대 예술법 등에 대처하여 도내 극장 운영에 있어서의 문화적 수준을 발전시키며 아울러 극장인의 상호친목을 도모할 것을 목표로 ‘경기도 극장협회’의 창립을 기도하고 있다. 즉 지난 16일 오전 10시부터 동협회 이사회는 동도협회 창립발기안을 가결하는 동시에 협회와는 전혀 분리하여 그 기성준비에 착수코자 위선 현 동 협회 이사 5씨 외 김두수金斗洙, 이영재李永宰, 안병기安炳奇, 김동열金東烈, 씨 등 준비위원을 선정하였다 한다. 그런데 정식 발기인대회는 지방연락이 되는대로 월중에 소집할 터이라고 하는데 동회의 발기인회를 대표하여 현 한성극장 사무국장 김두수씨는 그 포부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극장인들은 적산 관리인 즉 대가조합貸家組合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야말로 문화의 교실을 지키는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여야 할 것으로 첫째, 앞으로는 각 극장에 개개로 상당한 성격적 치수를 가져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현재 ‘홍도야 울지마라’ 등은 서울 치고 어느 극장에든 올리는데 그런 것도 필요하다면 필요하고 극장에 영화면 영화, 좀 수준이 높으면 높은 데로 울리게 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각 극단이 연명책으로 실제로 문이 없는 고리로 단행을 하는 예가 있는데 이런 일로 극장 측에선 우금껏 등한시 혹은 오불관언의 태도로 있었는데 앞으로는 도 단위의 강력한 협회가 생기면 거기에서 부수 사업으로 그런 자금융자 혹은 기타의 알선사업 등이 실시 될 줄로 안다.(藝術通信 267호. 1946년 8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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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57)김종욱 조선 최초의 시험으로 예술진흥회가 기획한 음악 키노드라마 ‘황포강’을 그 후 박시춘음악단 전원의 출연으로 청구영화사에서 제작 중이던 바 이번에 드디어 인천 로케로 그 촬영을 완료하고 방금 현상 중이라고 하는데 일반 공개는 오는 9월 하순경으로 벌써부터 그 성과가 크게 기대된다고 한다. 그 뒷 스탭과 출연자는 아래와 같다. 각본 백운영白雲英 연출 신천申泉 촬영 고인형高仁亨 음악 박시춘 출연자 송달협宋達協 김용대金龍大 이수룡李秀龍 이인권李寅權 홍청자洪淸子 외 전원(藝術通信 267호. 1946년 8월 19일) [‘똘똘이’ 효과를 이상만李相萬씨 담당 ] : 남일영화사 작품 ‘똘똘이의 모험’이 방금 광희정에 있는 조선영화사 분실에서 편집 중에 있다 함은 기보한 바와 같거니와 이번에 그 효과에는 방송국 근무 중인 라듸오 드라마의 효과 담당 이상만씨가 담당키로 되었다 한다. (藝術通信 267호. 1946년 8월 19일) [영화 검열보] 검열월일 제명 소유자 8. 9 ‘토스카니니’ 공보부 동 미국영화 제7권 동 동 ‘강철가鋼鐵街’ 동 동 ‘인력人力과 토지’ 동 동 ‘레테 작전’ 동 해방 1년 사진전, 16일부터 1개월 간 자유신문사 사진부에서는 벌써부터 해방 1년 동안의 사진을 래 일반으로부터 모집하고 있던 바 금번 그 응모 작품 중에서 우수한 80여 점과 동시에 기록 사진 안 백여 점을 갖고 일작 16일부터 서울 만물점 갤러리에서 9월 15일까지의 1개월 간 장기전을 개최한다고 한다. 그런데 특히 회기 중 그날의 시사속보 사진도 진열한다고. ’(藝術通信 267호. 1946년 8월 19일) =연극 = [소인극운동에 대한 의견서(2)]= 조선연극동맹 서기국 발표 1. 조직 소인극운동은 그 직역職域 또는 지역의 전체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의미로서는 그 직장에 있는 노동조합이나 농촌에서는 농민조합이나 또는 문화단체 같은 단체와 연락을 가지는 것이 옳으며 굿을 좋아하는 친구들끼리 모여서 XX극단, ㅇㅇ극단 하는 조직은 절대로 피할 것이며 어디까지든지 생활의 강화와 혁신을 위한 운동의 조직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공연 시의 태세를 본다면, 공연 총지휘자- 관객 동원부= 회장 설비계, 장내 정리계, 관객 동원계, 조사계 회계 연극 지도자= 무대부, 문예부- 연구계, 각본계 이상과 같으나 이것은 꼭 이래야만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 직역 또는 그 지역에 따라 소인극 운동의 이념에 충실한 조직을 고안考案함이 좋을 것이다. 2. 활동방법 연극을 위한 연극이 아니며 반 직업화를 피하는 의미로 그 직장의 연중행사 때나 또는 특별기념일 또는 그 지역의 특별한 명절을 이용해서 다 함께 유흥할 수 있는 날을 택하여서 년 2회 내지 3회가 적당하다. 여기에 주의할 것은 문예부의 연구계와 관객 동원부의 조사계 이 두 부서의 활동이다. 이계爾係에서는 밀접한 연락을 가지고 연구계는 공연 중 관중석의 공기와 무대에서 오는 감명이 어떻게 반영하는가를 연구하여 각본 선택의 자료로 하며 조사계는 그 공연 전체가 그 직장 또는 마을 사람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를 조사해서 연구계에 상담하여 다음 공연의 기획에 참고가 되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공연이 끝난 후는 공연 태세를 해제할 것이며 문화부= 문예부= 교육부와 같은 단순한 조직으로 하되 그 직장 그 지역의 문화활동의 일환으로서 문화운동에 참가하여야 한다. 그리고 당시 활동에서 주의할 것은 지방순연을 하고 있는 직업극단에서 조연을 부탁 받을 때는 그 극단의 내용을 주지하는 바 있더라도 가급적으로 찬조는 피할 것이며 소인극 콩쿨 같은 기획에도 우승기 또는 상금에 유혹되어 용이하게 참가할 것을 피함이 좋다. 특히 이런 소인극운동은 일시적인 운동에 끊치는 수가 많으나 그런 활동은 틀리는 것이다. 꾸준히 장구한 활동 중에 결실하는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藝術通信 267호. 1946년 8월 19일) [‘참새의 춤’ -낙수첩-] : 악극 여우 박 모는 일찍이 동서 중의 본부인과 헤어지기까지 하고 그이와 초연의 꽃을 피어 한동안 항간에 박람회 구경 다녀온 박첨지 진담珍談같은 수소문을 퍼eM리더니 그이 귀국한 이래는 한숨(눈물 아닌)의 부르스에 하염없었는데 또 최근엔 그이로부터 정식 결혼 차 찾아온다는 소식이 날아와서 참새처럼 좋아한다고- 하기는 참새란 백세까지 춤추는 것이니까.(藝術通信 267호. 1946년 8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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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56)김종욱 조선 제일 호화극장 물경! 이화고녀 재단의 쾌거 서울 정동 양인지구에 대 극장이 건립된다. 색다른 소문도 없이 실시되려는 이 뉴스 더욱 그 건립자가 이화고녀 유리재단有履財團이라 함에 한층 세간을 놀라게 하며 주목되게 할 바 있는 것이다. 즉 소련영사관보다는 윗 편인 두 외국 공관사이에는 불출세의 공지 1만 5천 평이 오늘의 이 획기적 계획들 가진 주인을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공지는 해방 전 구 이왕직의 소유였던 것을 경성일보가 소위 출판국 별관을그 근처에 차리면서 이 토지를 매수하였던 사실이 있었는데 금번 그 경성일보가 재산을 정리하면서 특히 군정청의 양해를 얻어 교육기관인 이화고녀 유리재단에 정식 불하케 되었고 동 재단은 여기에 우리나라 제일의 예술전당으로 대 극장을 건립하여 거기에서의 수익으로 학교를 유지하자는 계획을 급기야 세워 결정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동교 학부형 이사회에선 지난 주일에도 그 실천을 위한 자재 설계 입장에 대하여 엄밀한 연구회의를 가진 바 있다는 바 어쨌든 이 계획은 천하의 찬사와 지지를 받으며 그 성공에 축복받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인데 과거 해방 전만 하여도 좋거나 글커나 우리 예술가의 자녀라 하면 무조건으로 입학을 우선 취급한다는 숨은 미담이 있었던 동교이니 만침 이 계획 또한 우연할 바 아니라는 더붙이기 공론公論-(藝術通信 266호. 1946년 8월 17일) [극장 매점론賣店論- 낙수첩-] 일제 시대엔 극장도 왜놈의 제2, 제3호 첩녀妾女가 그 매점에 고양이처럼 도사리고 앉아있는 모양인데 설마 이즈음이야 그럴 리 없겠지만 개중 모 대 극장 같은 데서는 이 매점을 백주白晝 모리수단 기관으로 이용하는 일이 있는 모양- 목마른 손님을 위하여 장내에서 서비스 한다는 의미보다 시중가의 갑절 이상 모리하는데 취미를 느끼는 일 그보담도 엊그제는 서적의 의탁판매를 부탁하고 3할의 수수료를 준다 했더니 이것도 사이다나 낙지 쪽으로 알았던지 5할 아니면 안 받는다고 거절, 그 서적가 15원에 7원 50전을 모리할 생각이 고위들에게 구내매점을 경영시키는 지배인씨(혹은 지배인 자신일지도 모르나) 하니까 극장은 문화인에게라고 하잖는가? 만약 지배인의 소신 아니거든 등하불명의 우愚를 씻을 것- 종로 S출판사 기寄-(투서 환영, 단 주소 성명 명기할 것. 지상 익명匿名은 자유 藝術通信 266호. 1946년 8월 17일) [청우대] 8. 15 벌서 해방 1주년이다. 회고컨대 작년 이날엔 즐거워서 울음 터진 우리 환희의 눈물과 함께 옷 적시어도 좋은 비가 내리었다. 적시어도 좋을 배 아니다. 그것 저것 정신 차릴 바 없이 그저 행렬 속에서 지내었다. 그러면서도 이날이 꿈 아닌가 싶어서 제 살을 꼬집어보던 일! 하나 1년은 어언 지났다. 해방과 독립은 꼭 같이 오는 다를 바 없는 의미인줄 알았더니 앞으로도 알 수 없는 아주 다른 의미인 것이었음에랴. 오늘 그 옛날은 그렇게 친하던 우인과 갈라져서(그는 종일 집에서 낮잠 잔다 했다.)저 행렬에 끼어 폭양에 거리를 겄드라니 감격에 치우쳐서 울면서 만세부르던 작년과는 이리도 의미가 다르랴. 서글프고 어색한 심사! 시인 모씨는 3. 1 기념일에 벌써 ‘봄이 오기 전에 3월 1일이 먼저 왔다.’ 고 노래하였던 것을 시방 새삼스럽게 읊어본다. 그렇다. 독립이 오기 전 아직 우리는 행렬 속에 있다. 오늘의 이 행렬은 우리 다 같이 싸움터로 나가는 행진이다. 우리 자주인민의 정부를 세우기 위한- 그리고 우리 예술가는 인민 속에 진정한 예술의 뿌리를 박기 위한 맹서의 만세를 웨쳐야 할 행렬! (藝術通信 266호. 1946년 8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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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55)하나, 직업적 연극집단이 아닐 것. 하나, 유희적 본능의 만족에 그칠 것. 소인연극운동의 이념 (1) 소인연극운동은 건강한 생활심리를 배양키 위한 오락운동이라 한다. 1. 자기의 연극적 재능을 자랑하기 위한 오락으로 알아서는 안 된다. 2. 생활의 불만이나 고민을 호도糊塗하거나 도피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3. 연극에 취미가 있다고 해서 소인연극에 열중해서는 안 된다. 4. 연극을 위한 연극이 되어서는 안 된다. (2) 소인연극운동은 집단생활 조직생활을 토대로 하여 생활의 협동화를 촉진이라야 된다. 1. 소인연극은 관객 자체가 같은 직장의 동무요 운동 자체 연극 자체가 친목을 제공하는 기회인 고로 언제든지 생활의 집단화를 도모할 수 있다. 2. 연극 자체가 다수 사람의 협력을 얻는 종합예술이라 협동정신을 배양할 수 있다. 3. 연극창조자와 향수자享受者 간의 건전한 생활감정을 표현하는데 기본조건이 있다. (3) 소인연극운동은 참가하는 사람의 자발성과 창의성을 존중해야 된다. 1. 직업연극과 달라 물질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불완전한 것이라 각자의 발안發案으로 연극을 해야 되므로 대담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 2. 지역 직업적 특성을 존중해야 된다. 3. 연극 창조자와 관객 간의 동질성을 소인연극의 근본으로 하므로 새로운 생활감정은 새로운 표현기술을 필요한다. 고로 직업연극에서는 볼 수 없는 기법을 발견함을 특수조건으로 할 수 있다. (4) 소인연극은 직업화하거나 반 직업화해서는 안된다. 이상의 이념으로 보아 소인극을 지도하시는 분은 우리 국민의 생활력 배양을 목적으로 한 것이며 실천 도중에 있어서는 자칫 잘못하면 직장생활과 유리遊離한 독선적이고 자위적인 연극을 위한 연극이 되어 도루 유해한 집단이 되지 않게 할 것이다.(藝術通信 266호. 1946년 8월 17일) [‘붓돌의 군복’ 무료 공연 17, 8 양일 창신국교서]: 기보한 바와 같이 민청民靑 동구東區위원회 직속극단 ‘청년무대靑年舞臺’에서는 8. 15 기념행사로 김사량金史良 희곡 ‘붓돌의 군복’을 가지고 공연 준비 중에 있던 바 드디어 금명 17, 8 양일 창신국민학교 강당에서 대망의 막을 열기로 되었다는데 특히 이번 공연에는 8. 15 기념공연이니 만큼 입장료로 일반대중의 관람을 요망하고 있다 한다.(藝術通信 266호. 1946년 8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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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54)김종욱 역사적인 해방 일을 기념하는 음악제전 문교부 주최 해방기념음악대회는 예정대로 작 16일 오후 7시부터 시내 경복궁 뜰에서 개막되어 동 9시 지나서 대성황리에 제1일을 맞추었다. 그리고 이날 출연단체는 남녀 중등 연합합창대를 비롯하여 고려교향악단 기타 취주악단 등이었다.(藝術通信 266호. 1946년 8월 17일) [‘음동音同’이 特講 설치코 공장 개창운동운동에 박차]: 음악동맹의 음악강습소 설치에 대하여는 기보한 바와 같거니와 금번 그 수강자가 예상이외로 정원을 훨씬 초과한 것과 그 응모자의 대부분이 공장 노동자 출신이라는 점에서 우금까지의 강습방법을 확장하여 금후는 공장을 단위로 하는 지역특별강습소를 정기적으로 순차 개강키로 되었다는 바 이로써 전국 工場 개창운동을 일으킬 기초로 수립할 터이라 한다.(藝術通信 266호. 1946년 8월 17일) [국악원 명창들 덕수궁 축전에]: 국악원에서는 금 17일 주야 2회에 걸쳐 한성일보 주최의 8. 15기념 덕수궁 축전대회에 이래와 같은 곡목으로 출연한다. 그리고 출연자는 오태석, 정남희, 조상선, 임소향, 김순희, 김소희,등 명창이 경창競唱 등장한다. 곡목= ‘춘향전’ ‘심청전’ 중에서 (藝術通信 266호. 1946년 8월 17일) [덕수궁 야외연주 24, 5일 연기, 지휘자는 임동혁任東爀 씨로 결정]: 자유신문사의 덕수궁 정례교향악의 밤은 조선서 처음의 야외연주회인 만큼 지난 제1 제2회에서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던 바 이번 17, 18 양일은 한성일보의 해방1주년행사 관계로 장소를 양여讓與하였으므로 제3 제4연주회는 한 주일 건넌 24, 5 양일간으로 연기되었다는 바 당일의 연주곡목과 지휘자는 이래와 같이 결정을 보았다 하며 그리고 이 회부터 중앙방송국에서는 현장에서 중계방송을 실시키로 되었다 한다. #지휘자=임동혁 # 곡목=1.교향곡 제4번 ‘시계’- ‘하이든’ 곡 2. 가극 ‘椿姬’ 중에서 제1막의 전주곡, 제3막의 전주곡- ‘베르디’ 곡. 3. ‘네 개의 조선적 소곡’- 임동혁 곡, 4. 음시音詩 ‘핀란디아‘ -’시벨리우스‘ 곡(藝術通信 266호. 1946년 8월 17일) [음악 교육은 이렇게 (12)]: 14. 아동들의 질문의 응답은 선생 단독보다도 다른 아동들의 해답을 장려할 것. 15. 음악 시간의 형식적 예의를 떠나 친교적으로 유희적 유쾌한 기분으로 보내는 방법을 연구할 것. 16. 아동들의 잘못을 나무라거나 落心하게 하지 말 것. 奮勵하고 용기를 주도록 친절할 것. 17. 발전이 없는 때 자기의 교수방법을 반성 검토할 것. 18. 항상 같은 방법으로 동일한 아동을 대하지 말 것. 19. 음악 시간은 재미있는 시간이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아이들을 음악의 샘[천泉]으로 잘 인도하게 하고 아동들로 하여금 시원한 음악 물을 마음껏 마시게 할 것이 우리 책임이요 목적이다. 만일 먹고 싶은 아동은 지유로 마실 것이다. (藝術通信 266호. 1946년 8월 17일) =무용= [광고] 보라. 참가하자 해방 조선의 처음 쾌사快事인 제1회 해방 여성체육제전 자격 일반 가정 부녀 직업여성 요금 무료 기일 8월 25일 까지 신입 장소- 해방여성체육제전위원회 황금정 2정목 199 청목빌딩 우주토건 종로 4가리 구 동일은행 적 조선 탭 댄스 연구소 명치정 2정목 25 개최일자 8월 29(목) 30(금) 장소: 서울운동장 주최: 조선과학여성회 후원: 동아, 한성, 민주, 자유, 중외, 중앙, 각 신문사 (藝術通信 266호. 1946년 8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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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53)김종욱 연예단 측으로서는 내부적으로 다음의 몇 가지를 반성함이 있어야 한다. 첫째, 일정시대의 불가피한 것이기는 하였으나 자기가 범한 대일협력의 죄과를(대소의 정도를 불문하고) 진심으로 참회함이 있어야 하겠다. 이 맘속의 오점을 씻지 않고는(그것도 방편적이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우리의 예술을 만들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8. 15 이후의 새로운 방편적 기회주의 원칙으로 돌아간다는 구실로서의 자기 합리화가 현대의 타락을 가져왔고 그 타락을 타락으로서 느끼게 하는 불감증까지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작가 연출가 연기자 운영자를 불문하고 8. 15 이후의 새로운 민중오도의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하여 절대로 필요하다. 조그만 과거의 죄과라도- 민중이 용서해주리라고 얏보는 것은 좀도적의 심리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로, 예술가이기 전에 먼저 어느 정도의 기술자만이 집결한 단체를 만들어야 하겠다. 8. 15 이후는 정계가 그렇듯이 연예계에도 너무나 수 많은 홍길동의 도량跳梁을 본다. 그것이 기술자의 분산과 작품의 결핍을 가일층 챗찍질하였다. 우후죽순은 좋으나 위기의 추풍秋風이 불 때 떨어지는 낙엽의 신세가 연예계의 현상이 조그만 일에 단체를 뛰어나오는 영웅심이 우리 연예계에 ‘앙상블’ 이라는 것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단결은 먼저 조그만 데서부터’ 이 표어로 나아가자. 끝으로 제목과 내용이 너무 양두구육羊頭狗肉이었음을 사謝한다.(끝 藝術通信 264호. 1946년 8월 13일) [3 단체 합동으로 해방기념 연예대회 ] : 태평양 백조 양 악극단과 손일평孫一平 만담 일파에서는 래 13, 4의 양일 간에 시내 탑동공원에서 해방기념 연예대회를 개최한다.(藝術通信 264호. 1946년 8월 13일) [서울 악극단 탄생 ]: 근로대중에게 건전오락을 제공하겠다고 서울극악단이 하나 탄생하였는데 동단에서는 단원 모집 겸 신인을 선발하고자 주간 ‘예술신문’사의 후원을 얻어 래 19, 20 양일 종로 YMCA에서 신인 남녀 가수콩쿨대회를 개최키로 되었다 한다.(藝術通信 264호. 1946년 8월 13일) [햄릿의 키스- 낙수첩] 대륙횡단열차 객실 내 풍경- 만약 그이가 나를 껴안고 한번만 키스를 해준다면 백 불을 줄테야. 키가 크고 호화스런 의복에 많은 보석으로 단장한 귀부인이 이렇게 말하였다. "정말 그이는 훌륭한 연극배우야. 그이의 연기에는 아주 스릴(전율)을 느끼지. 그이는 지금 우리 뒤 넷째 좌석에 앉아있는데 같이 앉은 여자는 아주 평범하지. 누굴까? ‘에드윈 부-스 말이요? 저 유명한 ’셰익스피어‘ 극 배우가 이 차 안에 있단 말이요. 아이구 머니나 다 들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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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자료 (52)김종욱 촌산지의村山知義 귀국 발표문, 우리가 해방되기 1년 전 옥중에서 전향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양해 초청으로 내조 연극문화협회의 고급촉탁으로 혹은 조선군 보도부의 의촉依囑으로 우리 고전 ‘춘향전’을 영화화하는데 동작同作 중 어사御使를 장차 상륙할 미군사령관으로 도령을 자원 종군자로 고쳐 뜻있는 우리 문화인을 분격시키는 일본의 사비 컴뮤니스트 촌산지의는 해방 뒤까지 서울에 버티고 있다가 드디어 도하都下 모지某紙 등의 지상추방을 받아 창황히 귀국한 것은 아직도 기억에 새로운 바 있거니와 그는 귀국 즉시 "조선의 연극인에”라는 일문을 초草하여 ‘예협藝協’ 팜플렛 1호에 게재한 바 있는데 특히 우리 연극인을 평하여 가로되 ‘이기적이고 질투심이 많고 감정적인 이론 다변가多辯家’ 그리고 ‘시간관념이 전혀 없다’ 는 등으로 횡설수설하였다. 비록 오늘 날 우리로서 볼 때에는 촌산 자신부터가 절조節操를 팔고 심지어는 한 개의 일제 주구역走狗役으로서의 기술자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으나 그가 조선에 체재하는 동안 그의 눈에 비친 연극인의 모양을 한 번 들여다 봄도 헛된 일은 아닐까하여 이에 요지를 따서 전기轉記하여보기로 한다. ‘30년 간 일본의 군벌 재벌에 폭로되어 정치적으로 또는 감정적으로 참을 수 없는 굴욕을 받아온 조선은 지금 일본과의 연관을 끊었다. 나는 8월 15일로부터 얼마동안 서울의 거리에서 본 저- 감격의 폭발모양을 일생 잊을 수 없으리라. 연극도 그 즐거운 와중에서 즉시 어제까지 있었던 극단은 하나도 없이 해체되고 민주주의적인 조직을 가지고 그 예술의 창조를 목적하는 극단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졌다. 여기에서 그가 서울을 떠나든 12월까지의 각 단체의 공연활동과 일부 극좌젇極左的으로 흐를 경향이 있었다는 등의 현지보고를 초하고 다시 조선인은 실로 연극을 사랑하는 민족이다. 일석一席 칭찬한 다음> 그러나 내가 조선연극인에게 고언苦言을 진상하려면 전체적으로 감정에 휩쓸리는 일이 많다. 한층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여 기초적인 것으로부터 공부해주기 바란다. 또 자기본위이고 질투심이 강하고 감정적인 의론이 지내 많으며 모든 연습 기타의 약속시간에 조금도 의무 관념이 없다. 모든 일에 그런데 특히 연극은 자기희생의 정신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깊이 명심할 것이다. 나는 이 등等의 결점을 조선에 있는 동안 실로 유감으로 생각하였다. 이 결점이 제거 불식拂拭되지 않는 한 조선의 연극은 진정한 발전을 바랄 수 없으리라. 나는 결점의 제거를 조선 연극인 전체의 긴급과제로서 여러 사람의 문제로 삼았으면 좋겠다. 제군은 이 불행한 낙인을 제군의 혼으로부터 세탁하지 않으면 안된다,(藝術通信 264호. 1946년 8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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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자료 (51)김종욱 연예단 측으로서는 내부적으로 다음의 몇 가지를 반성함이 있어야 한다. 첫째, 일정시대의 불가피한 것이기는 하였으나 자기가 범한 대일협력의 죄과를(대소의 정도를 불문하고) 진심으로 참회함이 있어야 하겠다. 이 맘속의 오점을 씻지 않고는(그것도 방편적이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우리의 예술을 만들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8. 15 이후의 새로운 방편적 기회주의 원칙으로 돌아간다는 구실로서의 자기 합리화가 현대의 타락을 가져왔고 그 타락을 타락으로서 느끼게 하는 불감증까지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작가 연출가 연기자 운영자를 불문하고 8. 15 이후의 새로운 민중오도의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하여 절대로 필요하다. 조그만 과거의 죄과라도- 민중이 용서해주리라고 얏보는 것은 좀도적의 심리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로, 예술가이기 전에 먼저 어느 정도의 기술자만이 집결한 단체를 만들어야 하겠다. 8. 15 이후는 정계가 그렇듯이 연예계에도 너무나 수 많은 홍길동의 도량跳梁을 본다. 그것이 기술자의 분산과 작품의 결핍을 가일층 챗찍질하였다. 우후죽순은 좋으나 위기의 추풍秋風이 불 때 떨어지는 낙엽의 신세가 연예계의 현상이 조그만 일에 단체를 뛰어나오는 영웅심이 우리 연예계에 ‘앙상블’ 이라는 것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단결은 먼저 조그만 데서부터’ 이 표어로 나아가자. 끝으로 제목과 내용이 너무 양두구육羊頭狗肉이었음을 사謝한다.(끝 藝術通信 264호. 1946년 8월 13일) [3 단체 합동으로 해방기념 연예대회 ] : 태평양 백조 양 악극단과 손일평孫一平 만담 일파에서는 래 13, 4의 양일 간에 시내 탑동공원에서 해방기념 연예대회를 개최한다.(藝術通信 264호. 1946년 8월 13일) [서울 악극단 탄생 ]: 근로대중에게 건전오락을 제공하겠다고 서울극악단이 하나 탄생하였는데 동단에서는 단원 모집 겸 신인을 선발하고자 주간 ‘예술신문’사의 후원을 얻어 래 19, 20 양일 종로 YMCA에서 신인 남녀 가수콩쿨대회를 개최키로 되었다 한다.(藝術通信 264호. 1946년 8월 13일) [햄릿의 키스- 낙수첩] 대륙횡단열차 객실 내 풍경- 만약 그이가 나를 껴안고 한번만 키스를 해준다면 백 불을 줄테야. 키가 크고 호화스런 의복에 많은 보석으로 단장한 귀부인이 이렇게 말하였다. "정말 그이는 훌륭한 연극배우야. 그이의 연기에는 아주 스릴(전율)을 느끼지. 그이는 지금 우리 뒤 넷째 좌석에 앉아있는데 같이 앉은 여자는 아주 평범하지. 누굴까? ‘에드윈 부-스 말이요? 저 유명한 ’셰익스피어‘ 극 배우가 이 차 안에 있단 말이요. 아이구 머니나 다 들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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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50)김종욱 요즈음의 또 한 개의 악극단 ‘무지개’가 탄생되었다. 동 악극단은 홍금석洪金錫씨 주재로 시내 주교정 43번지에 사무소를 두고 있는데 창립공연으로는 오는 26일부터 1주일 간 시내 제일극장에서 홍영洪影 작 겸 연출로 악극 ‘낙화유수落花流水’(전 10경)를 올린다고.(藝術通信 263호. 1946년 8월 12일) [청우대] 거리를 다리는 음악전차가 거듭 일본 이아기로 죄송한 터이나 목하 동경 시엔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에 걸쳐 매일 음악을 연주하는 전차가 달리고 있다 한다. 즉, 그들은 그들의 ‘제도帝都 청정화운동’의 한 가지로 도민생활국都民生活局 교육과와 문부성文部省 음악국이 주체가 되어 청산차고靑山車庫에서 세 대의 전차를 발차시켜 여기에 여성 취주악단과 합창단이 탑승되어있다는 것이다. 남의 하는 것을 그대로 직입直入 모방模倣하라는 것도 싱거운 일일지는 모르나 도대체 우리 수도엔 생활하는 낭만이 없다. 샐러리맨은 생활고와 아침 저녁으로 전차 행열 또 만원속에 시달리고 거리마다의 먼지통에 상 찡그리고 사는 모양, 생활지옥이라면 과장이랄까. 여자 경관의 교통정리와 도람 깡의 휴지통도 좋지만 ‘귀로부터의 청정화운동’ 한 번 모방할 법하다. 음악교육과는 영역 아닐지는 모르나 다- 우라 수도의 명랑화를 위하여 운수부와 한 차례 건네보면 어떻소? (컷은 동경의 음악전차) (藝術通信 263호. 1946년 8월 12일) [대두擡頭하는 반동과 그 극복책(4): 채정근 극장 관계인은 극장 건물을 연예물의 향상과 극단과의 공존공영을 위하여 이용하려고 하기보다 일정시의 경영법을 그대로 답습하여 영리에만 급급하려는 기풍이 대다수다. 이 영리를 위한 극장 수입 증가를 꾀하는 나마에 당당한 한성극장협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맹극장의 관리인 중의 일부 인사는 저속한 악취미를 지나 악랄惡辣한 상연물을 연예단체에 강요하는 것이다. 여기서 소위 일부에서 문화인은 산반算盤을 모른다 하며 극장 경영의 자격이 없는 듯이 폄貶하는 유배流輩도 있으나 실은 문화인들이 경영에 절대로 참가해야 한다는 근거가 나오는 것이다. 이상에서 주로 연예단의 경제적 예술의 향상발전을 위하여서는 극장 획득 내지 극장과의 밀접한 제휴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였다. 이를 위하여서는 연예단은 극장협회와 어떻게 하여서든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당장에 극장협회에 예속隸屬하라는 뜻이 아니고 또 극장협회 측으로서는 연예단과의 협력을 하지 않는 한 외국영화 식민지화의 구렁텅이에 빠질 뿐 아니라 조선 연예계에 대하여서는 반역적 행위를 범행하는 죄과를 지게 되는 것이다. 특히 현재의 극장의 대부분이 적산 관리에 속하여있는 극장의 이윤이 그대로 관리인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 만큼 더욱 문화적인 면을 살려 연예계를 향상 시키는 것이 관리인으로서의 가장 중요한 임무인 것이다. (계속) (藝術通信 263호. 1946년 8월 12일) = 무용 = [광고= 조선무용예술협회朝鮮舞踊藝術協會 창립공연 곡목] ‘원무곡’= 서울무용원 정지수 한동인 조영희趙英姬 김이원金梨園 이경희李卿姬 허문경許文卿 김영 유성희柳星姬 ‘봉선화=’ 조용자 ‘산신무山神舞’= 정인방 ‘비단緋緞거미’= 한동인 마음= 이석예 ‘탕자蕩子의 골맥骨脈(제삼열품第三列品)’= 김해성 ‘고苦’= 구연묵具然黙 ‘탈춤’= 임경희 ‘만종’= 조택원 이석예 김선영 ‘무고舞鼓’= 이석예 강선옥姜善玉 ‘해방’= 박용호 ‘아리랑 회상곡’= 진수방 ‘산에 즐거움’= 함귀봉 김용화 ‘여명黎明’= 조환曺煥 ‘다부라의 리듬’= 장추화 ‘화랑’= 정지수 ‘지열地熱’= 김미화 ‘애국가’= 전원(藝術通信 264호. 1946년 8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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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49)해방기념 미술전 인천 미술회관에서는 이번에 신설을 기념하여 오는 15일부터 15일 간 해방1주년기념 동양미술전을 개최하기로 되었다 한다.(藝術通信 263호. 1946년 8월 12일) [인천에 미술회관]: 현재 인천에 체재 중인 화백 이근영李根榮씨가 중심이 되어 동 시내 유지들의 알선으로 전 영국영사관저에다 인천미술회관을 신설하였다는데 이 회관은 인천에서도 일 이류를 다룰만치 거巨 건물로 금후 인천에 있어 미술문화 발전의 장래가 크게 기대된다. (藝術通信 263호. 1946년 8월 12일) =음악= [80%가 가요곡을 희망, 희망음악 1주 응모자는 2백 명 =방송=]: 미군정 관리 서울 중앙방송국이 매일 아침 연주하는 레코드에 의한 희망음악시간은 벌서 지난 5월 5일 개시 이래 3삭이 지났다. 그런데 최초의 모집 5일 간의 희망 신청자 수는 약 백 명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 뒤 점차로 늘어서 최근엔 한 주일동안의 집계가 260명이나 되어 배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한다. 이 숫자로 미루어보아 우리 국민이 비록 레코드 연주일망정 얼마나 음악을 사랑하고 즐기는 민족인가를 엿볼 수 있다 할까! 그런데 이 희망자 가운데 80% 이상이 가요곡과 달콤한 신민요를 요망하고 있다 함에 일부 높은 수준의 클라식만 찾는 청취자들에겐 좋은 표본이 되는 것으로 이에 빛춰 방송 담당자들의 고충도 알 듯한 일- 특히 음악 시간 담당자는 ‘베토벤’이나 ‘슈벨트’를 선택 연주하면 그 ‘밴또 방망이’이인지 ‘베토벤’인지 그만 집어치우라는 투서가 난입한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어쨌든 가요나 민요를 음악 아니라고 질색할 순 없는 바에야 이만침 성과를 보는 것은 자못 유의의한 일이라 할 것이다.(藝術通信 263호. 1946년 8월 12일) [미가입 단체의 입회를 촉진-가협歌協-]: 이제까지 가악 극단체는 난립한 채 가극동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데 뭉침이 없이 각자 각양의 자의恣意대로 나와 폐단이 많았으므로 지금 신발족하여 쇄신 갱생하려는 가극협의회는 금반 다음 규정으로 미가입 가악극단의 입회를 촉진키로 되었다고 한다. #단명, 단체취지서, 대표자 이력서, 자산, 단원인명부 #중앙공연 회수 급 작품명 # 입회금 2천원 # 회비 1천원 # 마감 8월 20일 한.(藝術通信 263호. 1946년 8월 12일) [음악 교육은 이렇게(10)] 3. 계속적으로 동일한 음부音符를(‘놀’의 장단長短) 사용하지 말 것. 되도록 1분, 4분, 8분, 16분 음부 등의 혼합으로 자미로울 것. 4. 거리가 넓은 비약 후에는 반드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일 것. (D) 선생은 학동들에게 서취식書取式으로 선율을 쓰일 것이 아니오 다만 ‘이렇게 쓰는 것이 그렇게 하는 것 보다 더 좋을 것이다’는 방법으로 학동들의 자신의 창작을 원조할 것. 이렇게 하면 학동들의 기분이 더 좋은 멜로디가 나온 것에 대하여 만족할 것이다. (E) 아동들의 멜로디는 완전한 어떤 가요의 형식이나 장단이 구비된 것은 기대치 말고 요하지도 말 것이다. 다만 간단히 2, 3절로 표현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노래임에는 틀림없다. 이렇게 자꾸 계속적으로 훈련한다면 점차로 완전한 작품으로 향하여 발전할 것이다. 이것은 선생의 지도여하에 큰 영향이 미칠 것은 재언을 요치 않는다. (계속)(藝術通信 263호. 1946년 8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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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48)김종욱 본지에 연일 ‘극장 민주주의’ 독본이라 제한 만화를 연재하여 절대 호평을 받고 있는 목정木丁 김용환 화백 하루는 시내 모 극장 구경 갔다가 봉변 당한 이야기. 씨가 휘호한 만화를 보지도 못했는지 혹은 보고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는 친구인지 입구 수원守員이 여전히 태연자약으로 담배를 비스듬이 물고 표를 받고 있었겠다. 때마침 김 화백 들어서는 판에 또한 거기 앉아있는 여자 수원. "산촌山村상(이것은 큰 일) 엊그제 만화 못 보셨수, 여기 섰을 땐 담배피지 말라구 한걸.”하고 주의를 하자니까 그 산촌상 씨! "애- 김용환이 같은 수작 그만 둬-”는 미리 알고 하는 수작인지 알고도 모를 일- 그러한 씨 또 일전엔 반회에서 회의가 끝난 다음에 김 선생은 그림도 잘 그리지만 오늘은 유행가 한 마디 부르라고 졸리워서 땀 뺐다고. ‘태평양’의 김용환 군과 동명이인일줄을 모르는 이가 아작 있을까!(藝術通信 262호. 1946년 8월 10일) = 영화 = [‘자유만세’ 촬영 완료]: 오랜 시일을 두고 촬영을 계속하여오던 고려영화협회 작품 최인규 씨 연출 극영화 ‘자유만세’는 금명일로 촬영이 완료된다는 늦어도 금월 내에는 완성을 보아 9월 초순에(극장 미정) 봉절될 예정이라 한다.(藝術通信 263호. 1946년 8월 12일) [천연색 영화 ‘패전 일본’ 7월에 완성, 전미에 공개]: 패전 일본의 양상을 캐취한 천연색 필름이 완성되었다. 미군전술폭격조사 영화반에서는 구주의 폭격상태를 촬영하여 유명하여진 D. A 맥카반 중위가 감독이 되어 작년 9월부터 약 1개년 가까웁게 원자폭탄의 피해지 광도, 장기를 비롯하여 각 전재도시와 폭격을 면한 경도 등 25 도시의 상황, 황폐한 장기수도원 지하실에서 거행된 미사, 꽃절 풍경등 그리고 가지가지의 고전악기 등 일본인의 생활풍경 등 여러 각도로 촬영한 것으로 완성과 동시에 전미에 공개된다 한다. (성조지) (藝術通信 263호. 1946년 8월 12일) [김신재여사와 ‘불량’ 전기시계] (낙수첩) : 영화 여우 김신재여사가 괜히 여배우만 보면 건드려보고 싶어 하는 불량청년을 슬그머니 골려준 이야기-. 언젠가 서울역에 누구의 배웅을 나갔었는데 전차속에서부터 거의 화뚝 같은 눈초리로 직시 겨냥튼 모던 청년 드디어 서울역 구내 대합실에까지 미행- 벌써부터 무슨 수작이고 건들어보려고 하나 종시 이편에서 그런 짬을 주지 않으니까 나중엔 궁리해낸 꾀도 영리도 해라. 선뜻 여사의 앞에 닥아서더니 "지금 그 팔목 시계 몇 시입니까?” 하고 수작- 이에 우리 김여사, "저 전기시계를 보시지요!.” 하였으렸다. 그 쳐다뵈는 벽상의 전기시계는 ‘불량’이라고 쓰인 딱지가 붙었더라고. 어지간한 강심장 모던 군도 코 떼고 줄행랑 삼십육계.(藝術通信 263호. 1946년 8월 12일) [영화 검열보] 검열월일 제명 소유자 8월 6일 ‘밀림의 포아’ 열광 同 ‘윤돈의 도스워스’ 중앙 同 ‘천국의 이인도중’ 중앙 同 ‘유나잇 데트 뉴스’ 중앙 同 ‘자自 191 지至 193’ 중앙 同 ‘남해의 뽀빠이’ 중앙(藝術通信 263호. 1946년 8월 12일) =극장= [ 서울 시내 극장 동원표(9일) ] 극장 제명 입장 인원 국제 영화 ‘조춘’ (제5일) 2036 국도 영화 ‘미국의 기밀실’ (제5일) 2157 수도 자유극장 공연(제2일) 1203 中央 혁명극장 ‘무영탑’ (제4일) 1028 서울 영화 ‘킹 소로몬’ (제2일) 1039 장안 ‘사랑 실은 특급열차’ (제4일) 863 제일 태평레코드 실연단 (제2일) 986 단성 영화 ‘비는 온다.’(제2일) 2342(藝術通信 263호. 1946년 8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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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47)김종욱 해방기념 국악전람회, 15일부터 동화백화점 국악원에서도 오는 해방 기념 당일부터 3일 간 시내 동화백화점에서 해방기념 국악전람회를 개최하기로 되었었는데 출품목록은 주로 조선고전 악기와 농악기 등이라고 한다. (藝術通信 262호. 1946년 8월 10일) [음악 교육은 이렇게(9)]: (A) 아동들이 어떤 멜로디를 만들 때 어떻게 해야 좋을지 꼭 막혔을 때에는 다소의 조력助力이 필要하나 절대로 조력은 가하지 말 것. (B) 전반의 아이들이 잘 아는 어떠한 이야기나 유희에 대하여 또는 교재에 대한 전체적 의미를 이해시키고 전반을 통한 창작을 장려함이 좋을 것이다. 처음에는 짧은 구절을 만들도록 해보아 작으마한 감정적 표현을 시試해볼 것이고 그 후에 n아동들로 전체의 멜로디를 맞추도록 하고 선생은 전반 아이들이 알 수 있게 '놀‘을 써서 보일 것. (C) 명민한 선생은 다음 아름다운 멜로디 쓰는 법칙을 기억할 것이다.‘ 1. 좋은 멜로디는 어떤 의미, 감정을 표시하는 언어와 같이 ‘행’해야(가야 될 것) 될 것이다. 2. 반드시 일어났다가 앉는 형태를 가질 것이요 단순하고 무미하게 같은 위치에서 머물거리지 말 것이다. 5, 6회의 ‘놀’이 계속적으로 상행하다가 안전한 위치인 아래로 향하여 불안한 감이 엊ㅅ고 유쾌하게 음을 지어내려갈 것.(藝術通信 262호. 1946년 8월 10일) = 무용= [단신- 김미화 양 상경]: 44년 서울에서 제1회 발표회를 연 후 금일까지 소식을 전치 않든 무희 김미화 영은 오는 12, 13, 14일 국도에서 열리는 무용예술협회 공연에 출연하게 되어 전북 전주에서 지난 번 상경하여 지금 서소문정 127의 1에 숙유宿留 중.(藝術通信 262호. 1946년 8월 10일) = 극장 = [예술과 이번엔 극장 예술가와 협의 ] : 극장 예술의 진정한 발전과 극장 예술가의 지도적 역할을 충분히 고려 검토하기 위하여 군정청 예술과에서는 이 방면 관계자들을 초청하여 래 13일 오전 9시부터 문교부 회의실에서 협의회를 개최키로 되었는데 동회의 결과로써 앞으로 프로 편성 등 극장 예술의 획기적 개혁이 있으리라고 보여 동회의 추이가 자못 주목된다. (藝術通信 262호. 1946년 8월 10일) [금주 프로] 국제 5- 11 영화 ‘조춘’ 국도 5- 11 영화 ‘미국의 기밀실’ 수도 8- 14 자유극장 공연 중앙 6- 12 혁명극장 공연 서울 8- 13 영화 ‘킹소로몬’ 제일8- 13 태평레코드 실연단 오우회 단성 8-13 영화 ‘비는 온다’ 장안 6- 9 ‘사랑 실은 특급열차’(藝術通信 262호. 1946년 8월 10일) [내주 프로 예고] 국제12- 13 ‘해방기념음악회’-예술과 주최 국도 12- 14 무용협회 공연, 15- 21 낙랑극회 공연, 영화 ‘제주도’ 수도 15- 21 토월회, 백화합동공연, 고향 공연 중앙 13- 19 청춘극장 공연 서울 미정 단성 14- 20 극단 민예 공연 제일 14- 19 영화 ‘청춘난무’ 장안 10- 14 영화 ‘모험의 왕자’(藝術通信 262호. 1946년 8월 10일) [서울 시내 극장 동원표(8일) ] 극장 제명 입장인원 국제 영화 ‘조춘’(제4일) 2177 국도 영화 ‘미국의 기밀실’ (제4일) 2407 수도 자유극장 공연(제1일) 1167 중앙 혁명극장 ‘무영탑’ (제2일) 1049 서울 영화 ‘킹 소로몬’ (제1일) 1000 장안 ‘사랑실은 청춘 열차’ (제1일) 809 제일 태평레코드 실연단 오우악단五友樂團(제1일) 803 단성 영화 ‘비는 온다’ (제1일) 2252 (藝術通信 262호. 1946년 8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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